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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명인] ②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 박동영

가슴 울린 꽹과리·북소리 인생의 전부가 되었다

기사입력 : 2022-05-12 08:02:40

깡촌에서 태어났다. 돈 벌겠다고 다들 도시로 나가던 70년대. 그도 나갔다. 부산. 아는 사람도 없고 별다른 기술도 없던 무모한 출향. 그때는 모두가 그랬다.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하다가 손을 심하게 다쳤다. 그걸로 몸으로 하는 일은 끝이었다. 낙담하고 고향으로 왔다. 아는 어른이 서도(書道)를 권유해서 시작했다. 재미있었다.

알고 보니 그에게 서도를 권유한 분이 밀양문화원장이자 전통놀이 보존회의 리더였던 박동선씨다. 그분에 의해 백중놀이 첫발을 디뎠다. 재미를 넘어 푹 빠져들었다. 사람들 앞에 서면 절로 흥이 났다. 자신 안에 그런 흥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40년 넘게 춤판을 휘젓는 밀양백중놀이 박동영(70) 예능보유자. 그의 장르는 상쇠와 오(五)북춤이다.


밀양백중놀이 박동영 예능보유자.

꽹과리를 두드리면 가슴에 불이 일었고, 북을 치면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사는 게 복잡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처럼 단순하고 흥이 날 줄이야. 이 땅 민초들의 삶이 팍팍하고 절망적이고 그래서 맺힌 한이 쌓일 때 가슴 시원하게 풀어낸 게 놀이 문화라는 걸 알았다, 인생의 한 부분이 될 거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 인생의 전부가 되었다.

양반이 도도하게 나오면 잡스런 인생들은 맞받아칠 능력은 없지만 뒤로 눙치며 그들을 비웃어 넘기면 그뿐이다. 병신, 곱추, 문둥이, 떨떨이, 절름발이, 중풍장이, 히줄래기. 하나같이 온전한 사람은 없지만, 그래서 세상에서 천대받고 가슴앓이 하면 살아가지만, 가슴 속에 담아둔 에너지만은 누구보다도 폭발적이다. 누구나 자기만의 특기가 있듯이 이들 모두 자신만의 끼와 춤과 특기가 있다. 그래서 그들을 일컬어 ‘범부들의 비범함’이라 칭한다. 그것을 끄집어내어 터뜨리는 가장 강력한 촉진물이 바로 상쇠와 북잽이의 역할이다. 백중놀이는 시작부터 휘모리로 들어가며 흥분을 배가시킨다. 앞놀이 잡귀막이 굿에서 모정자 놀이로 넘어가면 덧뵈기(자진모리) 중모리로 넘어가다가 양반춤을 지나 병신춤 범부춤으로 넘어가며 다시 자진모리로 열기를 터뜨린다.

깡촌서 태어나 1970년대 도시 나갔다 돌아와
밀양문화원장 박동선씨에 의해 백중놀이 첫발
꽹과리 두드리고 북 치면 가슴 뚫리고 흥 절로
인간문화재 명인들에게 각종 춤 전수받고
상쇠와 오북춤 추며 40년 넘게 춤판 휘저어

1981년 중요 무형문화재 지정된 밀양백중놀이
몸짓·표정에 온갖 감정 일었다 스러지며
노동 고단함, 억눌린 민초들 슬픔·애환 풀어
보존회장 맡아 맥 이으며 40여명 제자들 육성
“무형문화재 위해서라면 지옥이라도 갈 것”


밀양백중놀이 박동영 예능보유자.

어화친구 벗님네야/이내 말씀 들어보소/오뉴월 삼복더부/불같이도 더운 날에/받도 매고 논도 매니/땀이 난다 땀이 난다/배는 고파 등이 붙고/목은 말라 불이 난다/열심으로 농사지어/부모 봉천하신 후에/나라 충성하여 주소/얼씨구 에헤 잊지마소/신농씨를 잊지마소/신농씨가 아니면은/에헤 어느 누가 농사법을 내어줄꼬/부디부디 신농씨를 잊지말고 살아보세/얼씨구 잘 한다/금년에 풍년이 진다/잘 한다/아이고 영감아 우리 영감아/병자년 숭년에/콩지름 갱죽 열아홉 그릇 묵고/뒤뜰 논에 새 보러가서/메띠기 뒤 달가지 채이 죽은 영감아/원통하고 불쌍하다/영감 죽고 간 날 밤에/꿈을 꾸니 속곳 밑이 축축하네/아이고 우리 영감아 원통하고 불쌍하다

-논매기 노래 전문


밀양백중놀이 박동영 예능보유자.

밀양백중놀이 박동영 예능보유자.

백중(百中)은 음력 칠월 보름이다. 보통 백중날이라고 불리는데 양력으로는 8월 중순쯤이니 태양이 가장 뜨거울 때. 떨어지는 태양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한바탕 놀고 나면 땀은 비 오듯이 흐르지만 몸과 마음은 오히려 시원해진다. 노동의 고단함, 억눌렸던 민초들의 슬픔과 애환을 단숨에 풀어내니 후련해지는 것이다. 농경민족으로 살아왔던 이 땅에서 대부분 전통놀이는 그런 형태로 발전해왔다.

현재 박동영 예능보유자는 보존회장을 겸하면서 밀양 백중놀이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연합회장까지 맡아 바쁘다. 무형문화재 발전을 위해서라면 지옥이라도 가겠다는 포부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의 삶 자체가 문화재감이다.


밀양백중놀이 박동영 예능보유자.

밀양백중놀이 박동영 예능보유자.

돈 벌겠다고 외지로 나갔다가 된통 혼이 난 그는 낙향하면서 오히려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았다. 밀양백중놀이. 평생을 북과 꽹과리 치고 춤을 추며 살았다. 그가 말한다. 자신의 아버지는 인근에서 ‘밀양 북쟁이할배’로 소문났을 만큼 북을 잘 쳤다는 것. 꽤 큰 논이 있었는데 끓어오르는 신명을 못 참아 오후 두 시면 일손 놓고 북을 들고 개울가 ‘둑방’에 올라 북을 쳤다는 것이다. 그러면 멱 감으러 오거나 나들이 온 사람들이 아버지 북소리에 맞춰 신나게 춤을 췄다고 했다. 동네 형들이 어린 박동영에게 닭춤이나 말춤을 가르쳐주면 대충 따라하는데도 잘 춘다고 박수를 쳤다. 아버지의 신명이 어쩌면 내림으로 받은 게 아니냐는 질문에 박동영 예능보유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한다.

놀이마당에서 한바탕 춤을 출 때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어눌한 목소리로 방금까지 함께 진지한 얘기 나누던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몸짓과 표정엔 온갖 감정의 흐름이 파도처럼 일어났다가 스러진다. 때로는 분노의 표정 때로는 환희의 표정 그리고 슬픔과 고통과 용서의 잔잔한 미소까지 천의 표정을 오간다. 그렇게 무수한 감정변화를 한 번의 공연에서 겪어내고 놀이가 끝날 때, 그의 표정은 한 번의 격렬한 생을 살아낸 사람처럼 무념의 표정이 된다.


밀양백중놀이 박동영 예능보유자.

밀양에는 봄철에 화류놀이, 여름철에 물놀이가 벌어진다. 이때 솜씨 좋은 놀이꾼들이 흥겨운 놀이판을 자주 벌여 왔는데 1900년대에는 김성숙, 김학문, 김기일, 하성옥, 김기익, 김극서, 김한기 등이 이름을 알렸다. 1930년대에는 박원실, 심선택, 한인시, 하보경, 최성식, 김타업 등이 놀이꾼으로 유명했다. 원래 처음에 〈들놀이〉로 소개되었고 그 뒤에는 〈병신굿놀이〉, 〈칠월백중제〉 등으로 소개되다가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조사에서 밀양백중놀이로 이름이 정해졌다. 그리고 1981년 마침내 밀양백중놀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된다.

현재의 보존회장 박동영씨는 백중놀이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던 그해 전수장학생에 선발되어 이수와 조교의 단계를 거쳐 감내게줄당기기 조교가 되었으며, 인간문화재 고 하보경 옹에게 양반, 범부, 북춤을 전수받았다. 역시 인간문화재 고 김타업 옹으로부터 쇠가락, 장고가락, 병신춤을 전수받았다. 이후 인간문화재 고 김상용 옹으로부터는 농요 오(五)북춤을 전수받는다. 그리고 2002년 2월 문화재청장으로부터 상쇠와 오북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밀양백중놀이 박동영 예능보유자.

전수관에서는 약 40여명의 제자들이 수련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무용학과를 졸업한 사람도 있다. 우리 전통놀이 무형문화재의 전망은 어둡지 않아 보인다. 오직 한 길로만 온몸을 불사르며 달려온 박동영 예능보유자 같은 사람이 있기에 가능했다. 사사로운 얘기를 할 때는 굳어 있던 표정이 무형문화재나 전통놀이 얘기만 나오면 얼굴에 웃음이 돈다. 공연얘기만 나오면 신이 나 마음은 이미 한바탕 춤판을 벌인 듯하다. 춤이 어떤 의미냐고 묻자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너털웃음을 웃다가 짧게 말했다.

“인생이라카능기 심각할 거 있십니꺼. 이 땅에 와가꼬 한바탕 놀고 가는기지예.”

그가 북을 왼손으로 힘주어 잡으며 일어섰다. 이미 그의 영혼은 춤을 추고 있을 것 같다. 고마운 것은 상설공연을 위한 시공간이 생겼다는 것. 4월 2일부터 6월 26일까지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3시 밀양 영남루 뜰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

김홍섭 소설가
김홍섭 소설가

김홍섭 (소설가)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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