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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명인] ⑥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

“12대째 이어온 무업… 선택 아닌 운명이자 숙명”

기사입력 : 2022-06-09 07:59:39

“내가 걸은 이 길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고, 지긋지긋한 굴레였으나 결국은 그 굴레마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생애였습니다. 11대 무업(巫家)의 탯줄로 잉태되었고, 그 핏줄은 무업(巫業)의 숙명이 되었으며 조상으로부터 비롯되어 내게 이르렀다가 다시 자식으로 이어지는 승계의 질긴 끈, 고통의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이 굿은 죽은 이의 영혼을 위무하는 진혼제이면서 산자의 행로를 밝게 비춰주고자 하는 기원과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속이 아니라 전승되어야 할 소중한 민족문화이며 전생과 후생을 잇는 진정한 축제입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가무 속에서 살아왔으니 인간문화재보다 별신굿 대사산이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정영만 선생이 별신굿 공연 중 맞이굿을 하고 있다./남해안별신굿보존회/
정영만 선생이 별신굿 공연 중 맞이굿을 하고 있다./남해안별신굿보존회/

남해안별신굿의 ‘별신’은 토속어로 ‘별손·벨손·벨신’ 등으로도 불리는데, 이 굿은 “개(바다)를 먹이는 굿”이란 뜻을 담고 있다. 짧으면 한두 시간, 길면 몇 날 며칠이 걸리기도 한다. 지금은 무대극으로 꾸며 지구촌 곳곳을 다니지만, 실제 어촌마을굿에서 비롯되었기에 그 전 과정은 고되고도 지난하다. 맨 먼저 마을의 수호신에게 무당이 마을에 도착한 것을 알리는 들맞이굿으로 서막을 연다. 당산 할아버지를 위해 주고 맞이하는 들맞이당산굿, 여명에 해를 향해 마을 사람의 복과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일월맞이굿, 용왕님께 바람을 막아주고 배의 안전과 만선의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굿, 이어서 부정굿, 가망굿, 제석굿, 선왕굿, 대굿(대잡이굿), 손굿, 손풀이, 동살풀이, 염불굿, 군웅굿, 떠도는 잡귀와 잡신을 풀어먹여서 축원하는 거리굿으로 진행된다.

1956년 통영 산양 풍화리서 태어나
어린 시절 신청서 전통예능 배우고
친·외가서 별신굿 모든 것 익혀
한때 업에서 벗어나려 겉돌았지만
결국 승계하며 대사산이 길 걸어
세 자녀도 모두 이수자로 전수 중

별신굿은 죽은 이의 영혼 위무하며
산자 행로 비춰주는 염원도 담겨
전생·후생 잇는 진정한 축제로
무속 아닌 전승돼야 할 민족문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별신굿 대사산이로 기억되고 싶어

통영 죽도마을 별신굿 중 용왕맞이.
통영 죽도마을 별신굿 중 용왕맞이.

통영시 한산면 죽도 등에서 펼치는 별신굿은 마을굿 형태를 띠지만 이와는 달리 실내 혹은 주요 행사 제의용으로 펼치는 소굿의 경우엔 단촐한 인원만으로도 가능하다. 필자는 죽도에서 몇 번, 예전 소설가 박경리 선생 장례, 이충무공 향사, 마산새물맞이 행사 등에서 만났다. 서막은 청신악 연주로 시작된다. 징을 중심으로 왼편엔 피리와 대금, 해금, 가야금, 오른편엔 장구와 북 등의 악기로 구성된다. 악사들은 무녀와 눈빛으로 호흡을 맞춘다. 마을의 안녕과 풍어 풍농을 기원하면서 음악과 소리로 넋을 부른다. 굿판이 무르익어 갈 무렵 무녀가 등장하여 흰 천 위로 작은 배를 띄워 바다에서 희생당한 한 많은 영혼을 위무하는 송신 장면이 인상적이다.

별신굿 공연 중 넋풀이 장면,
별신굿 공연 중 넋풀이 장면,
별신굿 공연 중 넋풀이 장면,
별신굿 공연 중 넋풀이 장면,

남해안별신굿엔 다양한 춤이 등장한다. 진춤, 승방무, 입춤, 올림춤, 용선춤 등이 그것이다. 진춤은 길고 느리다는 뜻을 가진 춤인데 다른 지역 굿에는 없고 오직 이 굿에만 있다. 신을 부르고 달래는 여러 의식 가운데 절정에 이르면 용 모양을 한 형상 속에 사람이 들어가 춤추는 용선춤이 시작된다. 이 모든 의식은 대사산이 정영만이 이끄는데, 연습 과정을 지켜보면 한없이 나긋한 춤신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엔 호랑이 같은 대갈일성으로 굿판을 긴장시키기도 한다. 굿판이 무르익고 서서히 대단원의 막이 내리기 전, 그가 등장하여 춤과 재담으로 굿쟁이들과 관객을 하나로 이어준다. 그의 춤사위는 섬세하면서도 애잔하고, 걸음걸음에는 절도가 있다. 청신악으로 첫 무대를 열었다면 끝부분에선 송신악을 연주하면서 굿을 마친다.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은 1956년 통영군 산양면(현재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출생했다. 어린 날, 풍악 소리를 구별할 즈음 자신이 선 곳을 둘러보니 그곳이 바로 통영 신청(神廳)이었다. 신청에선 가곡(歌曲)과 가사, 춤, 시조, 잡가 등 전통예능 일반의 대부분을 가르친다. 이렇게 신청 시절에 익힌 여러 예능은 현재 무업을 행하는 토대가 되었다.

더 한참 윗대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고조부 정종원에서 증조부모 정철주·유선이, 조부모인 정봉호·고주옥, 정봉호의 형제인 정치호와 정모연(왕고모), 그리고 아버지 정덕재, 어머니 박옥희에서 자신으로 이어졌으니 그 면면한 피는 거스를 수 없는 가업이었다. 철없이 뛰놀 나이인 대여섯 즈음부터 조부인 정봉호로부터 무가, 피리, 징 등의 연주법 물론, 지화 제작법을 전수받았고, 정모연(남해안별신굿 초대보유자)에게 무가, 무무, 승방무의 전반적인 것을, 이모할머니 고영숙에게 소리, 꽹과리, 통영진춤을 배웠다.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

이렇듯 딱히 누구로부터 특정한 무엇을 배웠다기보다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몸에 밴 윗대 가족으로부터 별신굿의 모든 것을 터득했다. 악기면 악기, 무구면 무구, 어느 것 하나 남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스스로 가무하고,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다른 이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다. 이렇듯 무업으로 대를 이어왔기에 큰굿 작은굿(잔삭다리)을 자연스레 체득하게 되었다. 별신굿 악기인 피리만 해도 자신이 직접 만들어 쓴다. 이를테면 통영 갯벌에 황죽을 묻어 둔 채 일년을 기다리는데, 염분이 스며들면서 독성은 사라지고, 짙은 갈색빛의 대나무는 정제된 소리를 내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 환경이 평생의 업이 될 줄은 몰랐다.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갈망도 있었다. 바닷가에서 났으니 바다를 일의 터전처럼 여겨 20대 초반엔 배를 타기도 했고, 30대 초반엔 개인택시를 하는 등 20여 가지가 넘는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끈질긴 운명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1987년 남해안별신굿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날, 외삼촌 박복률이 타계하면서 악사로 참여하게 된다. 늘 익혀왔던 재능이기에 그 길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그때 그의 아내가 물었단다. “굿과 살라요? 나와 살라요?” 그의 대답은 “굿과 살겠다”였고, 그날부터 부인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남해안별신굿 중 공사(공수)하는 장면. 사람들의 액을 털어 내는 의식이다.
남해안별신굿 중 공사(공수)하는 장면. 사람들의 액을 털어 내는 의식이다.

그 무업의 승계는 이미 점지된 것이었고, 자신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본격적인 별신굿 대사산이 준비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 정모연으로부터 제반 일들을 전수받았으며 무구 일체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리고 2대 예능보유자인 친할머니 고주옥이 타계하자 본격적인 대사산이의 길을 걷게 되었고, 1996년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정영만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자신이 그랬듯이 세 자녀 모두 별신굿 이수자로 무업을 전수받고 있다. 맏이는 피리악사, 둘째 아들은 대금악사, 딸은 무녀와 해금악사가 되어 12대째를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20여명의 이수자 혹은 전수자들이 별신굿을 배우고 있다. 통영 이순신공원에 있는 전수회관은 규모는 작지만 그들의 땀이 배어있는 보람찬 공간이다.

남해안별신굿 공연.
남해안별신굿 공연.

남해안별신굿은 하나의 훌륭한 공연이다. 대본은 물론, 연출가(대사산이), 대모와 악사들, 의상, 도구, 그리고 관객(마을 사람) 등 공연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지구촌 여러 곳에서 초청받고 있다. 이 굿이 세계인과 함께하는 이유는 축제적 기능, 통합적 기능, 정치적 기능, 예술적 기능 등 우리 고유의 신앙에서 인류 공통의 것으로 승화되는 민족문화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이달균(시인)
이달균(시인)

이달균 (시인)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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