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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명인] ⑦ 광려산 숯일소리 보유자 정채남

“내서 주민 영혼 담긴 노동요 계승, 한평생 멈출 수 없죠”

기사입력 : 2022-06-16 07:59:55

땡볕 내리쪼이는 모내기 논에서 낭랑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머리질고 고분처자 줄뽕남개 앉아우네/줄뽕갈뽕 내 따서주마 백년해로 내캉하자/해당화야 해당화야 명사십리 해당화야 해당화꽃이 곱다한들 우리님 얼굴에 당할소냐/임이 죽어 연자가 되어 춘세끝에다 집을 지어 들면보고 날면봐도 임인줄을 내몰랐네(내서 정자소리 모심기 노래 부분)’

걸판지게 뽑아낸 소리의 주인공은 뜻밖에 어른이 아니다. 어른 틈에 끼어 모를 심던 어린 소녀가 입으로 웅얼거리다가 흥이 오르자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소리다. 이미 소녀에게 주변은 안중에도 없다.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팔다리 걷어 부치고 손엔 모를 쥔 채 당차게 소리한다. 눈은 지그시 감고 손짓에 어깻짓에 머리 흔들며 무릎까지 들썩 들썩 11살 소녀는 넓은 들판에서 저 혼자 소리삼매경에 푹 빠져들고 있다.

정채남 광려산 숯일소리(경남도 무형문화재 제43호) 보유자가 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광려산 숯일소리 보존회 전수관에서 열린 전승공개 공연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채남 광려산 숯일소리(경남도 무형문화재 제43호) 보유자가 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광려산 숯일소리 보존회 전수관에서 열린 전승공개 공연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처음에는 킥킥 웃으며 ‘저 녀석 봐라?’ 하는 마음으로 쳐다보던 어른들이 어느새 모두 모심기도 잊고 서서 소녀의 소리에 빠져든다. 길고 긴 들일소리(정자소리)의 여섯 소리 중 다섯 소리가 끝나갈 때 쯤 비로소 주변을 인식한 소녀는 입을 다물었다. 멍하니 쳐다보던 주변 어른들이 손에 든 모를 집어던지고 박수를 쳤다. 소녀는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70년이 지났다. 경남무형문화재 43호 광려산 숯일소리 정채남(82) 보유자는 지금도 경남의 소리마당 한가운데를 현역으로 종횡무진이다. 정채남 보유자가 평생을 바쳐 굳이 내서읍의 노동요를 보존하려고 집착했던 이유는 있다.

마산 내서읍 평서리서 대 이어 살아와
차도 뚫리기 전까지 도심과 단절돼
어린시절부터 논밭서 노동요 즐겨 듣고 불러

호계리가 고향인 남편 백종기씨와 함께
노동요 채록·고증 중 신감리 일대 전승되던 광려천 숯일소리
숯 굽고 숯굴 재현하며 30여년 걸쳐 복원

사재 들여 노력 끝에 무형문화재 지정… 현재 딸·아들이 이수
또다른 소리 보존하려 여든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고군분투 중

정채남 광려산 숯일소리(경남도 무형문화재 제43호) 보유자가 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광려산 숯일소리 보존회 전수관에서 열린 전승공개 공연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채남 광려산 숯일소리(경남도 무형문화재 제43호) 보유자가 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광려산 숯일소리 보존회 전수관에서 열린 전승공개 공연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채남 광려산 숯일소리(경남도 무형문화재 제43호) 보유자가 지난 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광려산 숯일소리 보존회 전수관에서 열린 전승공개 공연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채남 광려산 숯일소리(경남도 무형문화재 제43호) 보유자가 지난 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광려산 숯일소리 보존회 전수관에서 열린 전승공개 공연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그녀는 내서읍 평성리에서 대를 이어 살아왔고, 함께 숯일소리를 발굴하고 고증받고 보존을 위해 뛰었던 남편 백종기(86) 회장 역시 호계리에서 대를 이어 살았다. 마산회원구 내서읍은 창원이라는 대도시의 행정구역 안에 있지만 고립된 섬이었다. 도심을 잇는 차도가 뚫리기 전까지 내서는, 무학산과 광려산이 창원 도심을 가로막아 완전히 단절된 곳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시골의 정취와 풍경 그리고 풍습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영화나 음악 스포츠 같은 일반적인 문화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학산 너머에서 사람들이 워크맨을 포켓에 넣고 이어폰으로 양희은이나 이수만, 나훈아 노래를 즐겨 듣고 부를 때도 이곳에서는 어른부터 아이까지 초군놀이, 들일소리, 숯일소리 같은 노동요를 불렀다. 일하거나 놀며 즐길 때도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노동요였다. 그래서 내서지역 안에서 노동요는 나훈아 이수만 노래보다 더 인기 있는 소리였다. 적어도 40여 년 전까지는 이처럼 내서읍이라는 ‘섬’에서 호계, 삼계, 원계, 감천, 신감, 평성리 등 작은 마을단위가 그들끼리 서로 등을 대고 주거니 받거니 살고 있었던 것이다.

모내기나 추수철 같은 바쁜 시기에는 아이들도 학교 빼먹고 들일을 거들었다. 시골에서는 그게 룰이었고 학교에서도 인정했다. 고된 일을 할 때 노동요는 필수였고, 가창력이 좋아 흥을 잘 돋우는 사람이 마을의 최고 ‘아이돌’이었다. 몇몇은 지역에서 명창, 즉 ‘마을가수’로 대접받았고 추수 끝나고 마을 축제가 있으면 이 마을 저 마을에서 그들을 모셔가기 바빴다. 그 시절 명창으로 불렸던 사람 중에 정채남 선생의 엄마가 있었고 나중에 민요를 전수해준 고종사촌 언니였던 고 황옥주 여사가 있었다. 어린 시절 정채남은 민요든 노동요든 한 번 들으면 ‘내 것’이 되었다고 한다.

정채남 광려산 숯일소리(경남도 무형문화재 제43호) 보유자가 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광려산 숯일소리 보존회 전수관에서 열린 전승공개 공연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채남 광려산 숯일소리(경남도 무형문화재 제43호) 보유자가 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광려산 숯일소리 보존회 전수관에서 열린 전승공개 공연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채남 광려산 숯일소리(경남도 무형문화재 제43호) 보유자가 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광려산 숯일소리 보존회 전수관에서 열린 전승공개 공연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채남 광려산 숯일소리(경남도 무형문화재 제43호) 보유자가 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광려산 숯일소리 보존회 전수관에서 열린 전승공개 공연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교사였던 남편과 함께 호계리에 거주하면서 그녀는 농협은행에서 근무했다. 그때는 차도 없어서 예금 권유나 대출 같은 업무를 이 마을 저 마을 오로지 발로 뛰어 했는데 그게 오히려 마을마다 숨어 있는 노동요를 채록하고 고증 받는데 도움이 되었다. 어느 날 ‘이거다!’ 싶은 소리가 귀에 꽂혔다. 바로 ‘광려산 숯일소리’다. 지역문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남편 백종기씨도 이 일에 절대적으로 힘을 보탰다.

우리마실 광려산에/주추캐는 저 처자야/너거집이 오데건데/해가져도 아니가노/나에집을 찾을라믄/비가오모는 줄기산이요/눈이오모는 백두산이요/해가지몬 컴컴산에/산상우에 안개산에/초당삼칸이 내집이요/잘도분다 이불매야/어허여루 불매야/광려산에 산신령님/무학산에 산신령님/옥수골못에 용왕님네/이숯굴이 잘도되몬/이숫팔아 부모봉양/장가도 가고지고 -광려산 숯일소리 중 다섯소리 불매소리 부분

광려산 숯일소리는 내서읍 신감리 일대에 전승되던 노동요다. 광려산은 해발 720m의 산세가 험준한 산으로 능선과 계곡이 상당히 넓게 형성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고려시대 때부터 숯을 만드는 숯굴이 산재해 있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일제시대 때 마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땔감으로 숯을 선호하면서 광려산에 숯굴이 성행했다. 노래는 일제시대부터 1970년까지 불리던 것인데 숯굴이 사라지면서 노래도 자취를 잃었다가 정채남 보유자와 만나면서 다시 빛을 보는 기회를 얻었다.

정채남 광려산 숯일소리(경남도 무형문화재 제43호) 보유자가 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광려산 숯일소리 보존회 전수관에서 열린 전승공개 공연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채남 광려산 숯일소리(경남도 무형문화재 제43호) 보유자가 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광려산 숯일소리 보존회 전수관에서 열린 전승공개 공연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채남 광려산 숯일소리(경남도 무형문화재 제43호) 보유자가 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광려산 숯일소리 보존회 전수관에서 열린 전승공개 공연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채남 광려산 숯일소리(경남도 무형문화재 제43호) 보유자가 3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광려산 숯일소리 보존회 전수관에서 열린 전승공개 공연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채남 보유자와 백종기 회장은 예전 숯일을 했던 박치동과 이인규(1935~2014)를 찾아가 숯굴을 재현했다. 교사가 뭐 하러 이 짓을 하냐는 핀잔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밤새 쪽잠을 번갈아 자며 숯을 구워내고 가사를 채록했고 고증을 통해 하나씩 복원했다. 그렇게 30년이 넘게 복원된 것이 광려산 숯일소리다. ‘숯굴터 신풀이-숯나무소리와 어산영소리-숯나무 목도소리-숯굴 등치는소리-숯굴불매소리-숯풍년칭칭소리’ 이처럼 여섯 소리를 따라가면 숯을 만드는 과정이 보인다.

경남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모든 걸 자비로 해결했다. 심지어 전수를 위한 공간 하나 없어서 사재를 부어 연수회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수 받을 사람을 모집해도 차비조차 제대로 줄 수 없는 실정이라 맥이 끊길 지경이 되자 딸 백미정(56)씨가 나섰다. 근무 잘하고 있던 교정직 공무원 자리를 박차고 나와 엄마의 모든 것을 이수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2017년 12월 21일에 경남무형문화재 43호로 지정받았다. 지금은 두 아들도 함께한다.

정채남 광려산 숯일소리(경남도 무형문화재 제43호) 보유자./김승권 기자/
정채남 광려산 숯일소리(경남도 무형문화재 제43호) 보유자./김승권 기자/

지난 6월 3일 숯일소리 공연이 있었다. 보존회 공연장은 작고 초라했다. 공연 공간도 좁지만 관객 열댓 명 앉으면 옆 사람과 무릎이 붙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채남 보유자는 내서 정자소리(들일소리)를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고군분투 중이다. 내서 들판에 카랑카랑 울려 퍼지던 들일소리를 사장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건 내서주민들의 전통이자 영혼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내서읍의 전통문화를 걱정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일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중이다.

지금 내서는 사통팔달 길이 뚫렸고 논밭이 있던 자리는 대단위 아파트와 현대식 빌딩이 빼곡하다. 요즘 내서의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으로 음악 들으며 스타벅스에서 밥값보다 비싼 커피를 홀짝이지만 그 자리에 울려 퍼지던 지역민들의 땀내 나는 노동요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른다. 이미 사라지고 있기에 더 소중하게 보존해야 한다는 것을 정채남 보유자의 청아한 소리를 들으며 깨닫는다.

김홍섭 소설가
김홍섭 소설가

김홍섭 (소설가)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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