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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3부 (18) 구인회의 방송 경영

[3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사돈 이병철과 함께 동양방송 설립·운영했지만…

기사입력 : 2022-06-23 21:51:51

1962년 이병철의 상업방송 동업 제안에

TV생산 도움될까 지분 50% 투자했지만

두 기업 직원 간 갈등·광고수익 적자 등

이해관계 얽혀 1965년 8월 방송사업 접어

이후 1971년 구자경이 ‘부산문화방송’인수

1980년 언론사 통폐합 때 완전히 물러나


구인회는 고향 지수 승산에서 협동조합을 경영하면서 1931년 3월부터 10월까지 약 7개월 동안 동아일보 진주지국 승산분국장 업무도 함께 했다. 당시 신문사 지사나 분국은 신문 판매나 보급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애국적 유력인사들이 참여해 민족운동을 선도하는 기능도 했다. 구인회의 언론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 구인회와 이병철의 방송사업 동업

라디오는 1962년 12월, 김규환 교수가 ‘라디오서울방송국’ 설치 허가를 받았다. 텔레비전의 경우 김용우 전 국방장관이 1962년 12월 31일, 체신부로부터 방송국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김규환과 김용우 두 분 모두 자본이 부족해 더 이상 운영이 어려워지자 이병철에게 허가권을 모두 넘겼다.

이병철이 사돈인 구인회를 만나 라디오와 텔레비전 상업방송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이병철의 제안에 구인회는 금성사가 라디오 생산에 이어 TV 생산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방송사를 경영하면 여러 가지 장점이 많으리라 판단했다. 1963년 서울방송주식회사(동양방송 전신)를 설립하고 구인회는 방송경영에 50% 지분을 투자했다.

공동으로 경영한 방송사업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구인회의 락희화학공업사와 이병철의 삼성기업문화가 상충돼 여러 문제점이 발생했다. 두 회사에서 파견된 방송국 직원 간의 갈등과 광고수입의 적자문제, 제작물의 이해관계 등이 항상 조율되지 못했다. 드라마 제작에 막대한 자금 지출도 원인이 되어 구인회는 마침내 1965년 8월 이병철과 함께한 방송 사업에서 철수했다.

# 최초의 라디오 민간상업방송국 부산문화방송

1927년 2월 16일 일제 강점기 때 경성(지금의 서울)방송국이 처음으로 라디오 방송을 한 날을 한국의 방송 시작으로 본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이 관리를 하다가 1948년 8월 15일 남한 정부기관에 인도되면서 한국에도 국영방송(KBS)이 출발했다.

1959년 4월 부산문화방송이 최초로 우리나라 라디오 상업방송을 했다./국가기록원/
1959년 4월 부산문화방송이 최초로 우리나라 라디오 상업방송을 했다./국가기록원/

민간상업방송은 서울보다 부산이 더 빠르다. 부산에서 민간상업방송은 ‘부산문화방송’ 회사명으로 1959년 4월 개국했는데, 이 방송이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상업방송국 개국이다. 서울은 부산보다 2년이나 늦은 1961년 12월 2일 ‘한국문화방송주식회사’이름으로 첫 민간상업방송을 했다. 부산이 서울보다 빠른 이유는 당시 부산시민들은 국영방송(KBS) 라디오보다 일본 방송을 많이 들었다. 이를 토대로 기업인이 상업 라디오방송의 가능성을 보고 설립한 것으로 보인다.

TV방송은 1971년 9월 럭키그룹 구자경회장이 취임하면서 사명을 ‘부산문화텔레비전방송㈜’으로 변경했다.
TV방송은 1971년 9월 럭키그룹 구자경회장이 취임하면서 사명을 ‘부산문화텔레비전방송㈜’으로 변경했다.

# 럭키그룹의 부산문화방송 인수

부산문화방송과 관련된 내용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부산문화방송이 개국 후 적자가 누적되자 부산일보와 조선견직을 경영하던 김지태가 1960년 4월 인수했다. 그러나 김지태는 5·16때 부산지역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환수금 조치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그 후 1962년 7월에 설립된 5·16장학회(현 정수장학회)에 부산문화방송의 경영권을 넘겼다.

5·16장학회는 1965년 3월 ‘부산 문화방송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하고 1970년 1월 24일 ‘한국문화방송 부산텔레비전방송국’을 개국했다. 역시 수익사업이 어려워 경영난을 겪자 럭키그룹 구자경이 1971년 9월 인수해 명칭을 ‘부산문화텔레비전방송’으로 변경했다. 그 후 1980년 언론사 강제 통폐합 시 구자경의 럭키그룹도 방송사업에서 철수했다.

국영 텔레비전 방송의 경우, 1961년 12월 31일 5·16군사정변 이후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정부 홍보용으로 KBS-TV가 맨 먼저 개국했다. 부산 KBS-TV는 1968년 4월 개국했다.

당시 서울에서 공연한 프로그램은 녹화를 하여 항공이나 철도로 부산까지 운송한 후 다시 편집해 방송을 했다. 부산 방송은 서울보다 일주일 정도 늦게 방송됐다. TV화면에도 본방송, 녹화방송이라는 안내 문구가 있었다.

우리나라 첫 컬러TV방송은 1980년 12월 1일 시작됐다.
우리나라 첫 컬러TV방송은 1980년 12월 1일 시작됐다.

# 사돈관계가 된 구인회와 이병철

구인회와 이병철은 1922년 지수보통학교에서 3학년 1학기를 함께 공부한 인연이 있다. 그 후 1951년 7월, 부산에서 삼성물산 주식회사를 경영하던 이병철이 구인회를 찾아가 외국에서 원당 수입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구인회는 락희화학이 크림사업에 이어 플라스틱 사업에 진출한 시기라 재정과 시간적 여유가 없어 정중하게 거절했다. 1957년 2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구인회 셋째 아들 구자학과 이병철의 차녀 이숙희가 결혼을 하면서 두 사람은 사돈이 되었다. 두 번째 공동사업 제안은 1962년, 이병철이 구인회에게 방송국 공동경영이었다. 두 사람은 동양방송을 설립하고 공동으로 운영했지만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1965년 구인회가 방송사업에서 철수를 했다.

# 의령 솥바위 가격은 얼마

의령 관문의 남강 물속에 솥뚜껑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이를 솥바위(정암)라고 부른다, 삼발의 솥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됐다.

이 바위를 중심으로 사방 20리 이내에 세 명의 큰 부자(富者)가 배출된다는 전설이 있어, 부자소원을 빌러오는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의령군 남강에 있는 솥바위(정암)는 약 64평으로 공시지가는 현재 약 74만원 정도이나 그 가치는 무한대다./의령군/
의령군 남강에 있는 솥바위(정암)는 약 64평으로 공시지가는 현재 약 74만원 정도이나 그 가치는 무한대다./의령군/

지수의 K-기업가 정신센터에서 실시하는 여러 가지 교육 중에 부자의 기운을 받는 창업주 생가 방문과 솥바위 견학 일정이 있어 몇 번 안내를 했다. 참가자로부터 정말 물밑에 발이 3개가 있을까? 저 바위의 면적은 얼마인가? 저 바위의 가치는 얼마인가? 우리 동네도 부자가 되게 옮기고 싶다 하는 황당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솥바위는 위에서 보면 하트 모양으로 되어 있다. 굴곡이 있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솥바위 전체 둘레는 약 70m이다. 폭이 가장 넓은 곳이 25m 전후이고 가장 좁은 곳은 약 11m 정도이다. 면적은 공부상 213㎡로 평수로는 약 64평 정도이다. 공시지가로는 ㎡당 3460원이니 73만6000원밖에 되지 않는다. 100만원도 되지 않는 가격이지만 이 바위의 무형자산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이 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10㎞ 이내에 의령군 정곡면 삼성 이병철, 진주시 지수면 LG 구인회, 함안군 군북면 효성그룹 조홍제 등 3명의 창업주가 태어났다.

# 상표가 특정상품의 대명사가 된 사례

상표가 상품 이름으로 인식되는 제품이 많이 있다. 머리가 아플 때 두통약 대신 “아스피린이나 게보린 주세요” 한다. 속이 더부룩할 때는 소화제 대신 “활명수 주세요” 한다. 조미료 대신 “미원 주세요” 한다. 상처난 곳에 붙이는 것도 밴드 대신 “대일밴드 주세요”가 아직도 통용되고 있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집앞 점방(그때는 마트란 상호가 없었고 00상회, 그 후 00슈퍼라는 상호가 붙었다)에 가서 “백설표 1봉지 사오너라”고 하고 심부름을 시켰다. 그것은 설탕을 사오라는 뜻이었다.

백설표는 제일제당에서 생산한 설탕의 상표이다. 대형마트에 갈 일이 생기자 아내는 하이타이와 퐁퐁 1통씩 사오라고 한다. 하이타이는 LG화학에서 만든 빨래 세제 제품명이다. 퐁퐁은 그릇이나 과일 등을 씻을 때 사용하는 주방세제 제품명이다.


<구인회의 한마디>

조급해 하지 말라, 조급할수록 정상적인 방법을 찾지 않는다

이래호(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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