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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명인] ⑭ 국가무형문화재 염장(발) 조대용

50년 장인 손길로 대 이어 지켜온 아름다운 ‘통영발’

조선 말기 무관 증조부 때부터 조부·아버지 이어 4대째 업으로 삼아

기사입력 : 2022-08-05 08:04:48

무더운 여름날, 대청마루에 걸려 하늘하늘 흔들리는 대나무 발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함을 준다. 어디 시원함 뿐이겠는가! 바깥이 녹음으로 우거지면 풀빛으로 물들고, 노을이 지면 홍조를 띠어 시시각각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는 발. 그야말로 발 하나 걸어두었을 뿐인데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섬세하면서도 묵직하고, 우아하면서도 신비롭다. 옛 시인들은 고운 보슬비가 내리는 광경을‘가느다란 발처럼 내린다(雨簾織)’표현했을 정도로 발의 매력에 빠졌다. 한국어를 가장 격조 있게 표현한 조지훈 시인도 발(珠簾)에 비친 풍경을 즐겨 노래했다. 대표시 〈낙화〉와 〈고풍의상〉에도 발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데, 흔히 보는 별과 달도 ‘발’을 통해 보면 봄밤 정취를 더욱 은은하게 느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근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선다 -시 〈낙화〉 부분-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에 곱게 늘인 주렴에 반월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 -시 〈고풍의상〉 부분-

4대째 통영발을 만들어온 조대용 염장이 자신의 공방에서 대나무로 발을 짜고 있다.
4대째 통영발을 만들어온 조대용 염장이 자신의 공방에서 대나무로 발을 짜고 있다.

발은 바깥 시선을 막아주면서 안쪽에서는 바깥을 볼 수 있게 한다. 때문에 프라이버시 보호 차원에서 일반가정은 물론 궁궐에서도 요긴하게 쓰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가옥구조가 아파트로 바뀌면서 커튼과 블라인드에 그 자리를 뺏기고 말았다. IMF 전까지는 가뭄에 콩 나듯 찾는 사람이 있어 명맥을 이었으나 점차 값싼 중국산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런 시대에 오히려 전통 발이 가진 쓰임새와 미적 가치를 무한한 가능성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이가 있으니, 바로 발을 업으로 삼고 지켜온 통영사람 조대용 염장(簾匠)이다. 이 분야 국가무형문화재는 한 명뿐이므로 그의 손끝에 발의 미래가 달려있는 셈이다. 매미소리가 발 틈으로 잦아들고, 이마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7월 중순, 통영 광도면 자택 작업장에서 그를 만났다.

“멋 모르고 뛰어들었다 죽을 고생했지요. 하다보니 점점 매력에 빠졌지만, 알면 알수록 더 캄캄해지기도 합디다. 무슨 수로 애 키우고 밥 먹고 사나 싶어…. 지금 생각하면 바보처럼 한 우물 판 것이 잘한 거 같습니다.” 잠시 회상에 잠겼던 그가 벽면에 걸어둔 거북문양 발을 가리키며 말을 엮어갔다. “이제 겨우 앞이 보입니다. 한류 열풍이 불더니 그 바람이 한복, 한식, 한옥 쪽으로 부는 걸 보고 머잖아 우리 발의 가치를 인정받을 날이 오리라 생각했죠”

50년을 한결같이 발과 씨름하며 자연스레 우리 아름다움에 눈이 틔였다는 조대용 명인. 그는 그새 미국 일본 프랑스의 초청을 받아 전시회를 열만큼 유명해졌다. 영감을 받기 위해 서울 코엑스에서 현대미술작가와 공동작품전도 가지고, 근래에는 사극 〈킹덤〉에 자신의 발 작품을 협찬하여 대중성을 가늠해보기도 했다. 또 경남문화예술진흥원 지원을 받아 젊은 무용수와 함께 춤 퍼포먼스를 미디어파사드로 제작하는 프로젝트에 참여, 발의 쓰임을 실험해보기도 했다. 그에게 발은 이제 배움의 원천이자 문화를 받아들이는 창(窓)이 된 셈.


조대용 염장이 만든 통영발.

조대용 염장이 만든 통영발.

조대용 염장이 만든 통영발.

“중국발은 대오리가 얇고 납작하여 걸어두면 종잇장 같이 작은 바람에도 펄럭거려 재미가 없어요. 우리처럼 문양을 넣어 짜지 않고, 색을 칠해버려 작품성이 떨어집니다. 일본발은 대오리가 두꺼워서 둔탁하고, 문양도 없이 실만 한두 줄 넣는 정도에 그쳐 매력이 없지요. 커튼과 블라인드는 밖을 완전히 차단하기 때문에 풍경과 어울리지 못하고요”

조대용의 발은 대오리로 섬세하고 우아하게 만들기로 유명하다. 가늘게 뽑은 대오리를 고운 명주실로 일일이 엮어 만든 발은 큰 것은 큰 것대로 점잖은 기품이 있고,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아담한 맛이 있다. 특히 희(喜), 길(吉), 아(亞) 등 글자문양과 육각형의 귀갑문양, 격자문양은 화려하면서도 고졸한 멋을 풍긴다. 무엇보다 발 본연의 매력을 유지하기 위해 발 색깔과 문양 색깔을 같은 계열로 하는 원칙을 지킨다. 언뜻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문양이 은은하게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데. 이것이 마치 베일을 쓴 여인처럼 우아하고, 은거하는 선비처럼 신비감을 자아내게 한다.


조대용 염장이 만든 통영발.

조대용 염장이 만든 통영발.

발을 짜려면 100일간의 힘든 공정을 거친다. 겨울에 3년생 시누대를 골라 껍질을 벗겨낸 다음, 네 쪽 여덟 쪽으로 쪼갠다(쪽살내기). 속살은 발라내어 밤에는 서리를 맞히고, 낮에는 햇볕에 한달 보름 말려서 보관한다(이 과정에서 연한 미색으로 변한다). 발 짜는 작업에 들어가면 한 감씩 가져와 1㎜ 두께로 자르고(잔살내기), 못구멍을 낸 쇠판에 대오리를 통과시켜 조름질을 세 번 정도 하여 0.6㎜의 아주 가는 대오리를 뽑아내는데. 발 하나에 대오리 가닥 2000개가 들어가니 엄청난 양이다. 명주실로 한 땀 한 땀 엮어갈 때 긴 발틀에 실패모양 고둥(고들개)이 춤추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고둥에 감긴 실이 제 길을 잃으면 짜던 발을 풀어서 다시 짜는 경우도 생긴다. 그렇게 만든 발 한 점 값이 1000만원 선, 들어간 시간과 노역을 생각하면 결코 비싸다 할 수 없다.

장인집안은 아니지만 솜씨 좋은 집안에 태어난 것이 운명이라면 운명. 조선 말기 무관이었던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시작해 면장을 지냈던 할아버지, 공무원을 했던 아버지를 이어 자신에 이르러서 발 짜는 일이 업이 된 것이다. 처음엔 어깨너머로 배워 용돈벌이로 나선 것이 제대 후 예기치 않게 출품한 발이 전국대회에 입상하면서 장인의 길을 걷게 했다. 이후 14년 동안 무려 열한 번 상을 타는데 1990년 문화부장관상, 1992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1995년 대통령상 수상으로 최고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에 100여 점 납품되어 지금도 사당 신위 사이사이에 설치돼 있다.


통영발을 드리운 거실 풍경.

“어디에 걸어두냐에 따라 분위기를 확 바꾸는 것이 발의 최고 매력인 것 같아요. 단 하나의 발로 공간분할을 이렇게 멋스럽게 할 줄 아는 민족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기에 아름다운 문양까지 새겨 넣으니 금상첨화지요. ‘발 하면 통영, 통영 하면 발’이라는 말도 괜히 생겨난 게 아니지요. 우리 것을 아끼고 사랑해야 세계도 알아주는 법인데, 찾는 사람도 배울 사람도 없으니….”

신이 나서 말을 하다가도 이내 말끝을 흐리기를 반복하던 그는 전통을 이을 젊은이가 없어 결국 자신의 아들과 딸을 설득해 제자로 가르치고 있는 사연도 풀어놓았다. 그러면서 “공예사관학교 같은 것을 설립해 전통공예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전국 사적과 향교에 전통계승 차원에서 발을 설치하게 함으로써 공예전수자들이 생업을 영위하도록 해주면 좋겠다”는 바램도 빠트리지 않았다.

김 우 태 시인
김우태 시인

김우태(시인)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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