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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법에서의 신의성실과 그 위험성- 정성헌(경남대 법학과 교수)

기사입력 : 2022-09-25 19:31:15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공부 열심히 해 보겠다고 새로 산 책을 밑줄까지 그어가면서 본다. 이런저런 핑계 속에 잠시 멈췄다가 다시 그 책을 ‘처음부터’ 열심히 본다. 그리고 또 다시… 그러고 나면 그 책은 앞부분만 새카매지고, 머릿속에 남는 건 그 책의 앞부분일 것이다. 필자에게는 고등학교 수학에서의 ‘집합’이 그런 부분이었다.

필자가 대학에서 가르치는 민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법이다. 법조문은 1000개가 훨씬 넘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민법을 2년 이상에 걸쳐 가르칠 정도로 내용도 방대하다. 개인간의 사적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을 모두 담으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데, 1000개 정도면 오히려 짧은 건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민법을 공부할 때도 웬만한 인내심이 없고서는 고등학교 수학에서처럼 앞부분만 열심히 공부하게 될 수도 있다. 어느 것이나 전체를 충분히 아우르지 못하고 부분만 아는 것은 위험하지만, 민법의 경우에는 수학에서 집합만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이는 우리 민법이 전체를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법을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내용이 우리법은 독일법을 모방하였다는 것인데, 독일은 각각의 독립된 것들을 묶어 상위개념을 만들어내기를 반복하고, 상위개념으로부터 각각의 구체적인 것 순으로 법전을 만들었다. 법에 대해 공부하겠다고 할 때 많이 듣게 되는 ‘총칙(혹은 총론)’, ‘각칙(혹은 각론)’은 바로 그런 구조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법은 이러한 구조가 가장 잘 반영되어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민법의 처음은 우리법에서 가장 일반적인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장 일반적인 내용 중에 ‘신의성실’이라는 것이 있다. 민법 제2조에 규정되어 있는 이 조항은 그 위치만으로도 이하의 모든 조항에 적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법과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이 개념은 사실 굉장히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다. 법전상의 문장은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하고, 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 규정은 구체적인 개별법제도들의 결론을 수정하는 기능을 한다. 그런 경우가 많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만큼 우리법이 엉망인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법은 인간이 만들었기에 그 자체로 불완전하다. 특히나 민법은 방대한 내용에다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화된 사회상을 담아내기 위해 수정되어 왔다. 어쩌면 처음부터, 혹은 변화되는 과정에서, 각각의 법제도가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이 경우 우리의 경우는 신의성실이라는 기치 아래 그 내용을 수정하곤 한다. 이는 ‘비상식’을 ‘상식’으로 바꾸는 어쩌면 꼭 필요한 제도이다.문제는 신의성실이 작용하는 경우에는 기존의 법제도의 수정이 따른다는 점이다. 법은 항상 ‘정법’이어야 하지만, 때로는 ‘악법’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악법도 법이다’라고 할 만큼 법은 그 자체를 지켜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현대에 있어서는 ‘법적 안정성’을 법에 최고의 가치로 친다. 물론 법적 안정성만이 유일한 가치는 아니다. 구체적인 경우에 상식적인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는 ‘구체적 타당성’ 역시 법에서 추구하는 중요한 가치이다. 하지만 구체적 타당성만을 앞세우는 경우 법은 그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

필자가 대학에서 민법을 강의할 때는 신의성실부터 가르치지 않는다. 누군가 신의성실부터 언급하면 따끔하게 혼내기까지 한다. 신의성실은 개별적인 법제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 이와 관련지어져서 인식될 때 그 가치가 발하고, 그 위험성도 줄어들게 된다. 그렇지 않고 신의성실만을 강조하게 될 때에는, 법은 상식적이어야 한다는 명제가 언제나 옳다손치더라도, 법은 더 이상 법이 아니게 될 수 있다. 절제되지 않은 신의성실은 그렇게나 위험한 것이다.

정성헌(경남대 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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