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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한글, 한국어, 한국인- 임채성(시조시인)

기사입력 : 2022-10-06 20:05:57

얼마 전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에 대한 문해력 논란이 있었다. 서울의 한 콘텐츠 전문 카페에서 올린 사과문이 발단이었다. 일부 이용자들이 ‘심심(甚深)한’의 뜻을 ‘깊고 간절한 마음의 표현’ 대신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뜻으로 오해한 것이다. 기성세대에게 이 말은 예의를 갖춘 정중하고 완곡한 표현이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탓이다.

뿐만 아니라 일부 학생들은 ‘사흘’을 ‘4일’로, ‘금일’을 ‘금요일’로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여기에 ‘모레(내일의 다음날)’나 ‘글피(모레의 다음날)’, ‘그제(어제의 전날)’나 ‘그끄제(그제의 전날)’ 같은 말은 아예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우리말 사용에 있어 가장 흔하게 저지르는 실수는 나이를 세는 방법의 혼동이다. 숫자나 수를 읽을 때 단위 명사에 따라 그 앞에 오는 수의 표현이 달라야 한다. 나이를 세는 단위 ‘살’은 고유어 수 뒤에 쓰이고, ‘세’는 한자어 수 뒤에 쓰인다. ‘마흔 한 살’이나 ‘쉰 두 살’, ‘41세’나 ‘52세’는 맞지만 ‘사십 한 살’이나 ‘오십 두 살’은 잘못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우리말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영어보다 낯설고 어려운 것으로 받아 들여지는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즉문즉답 식의 소통을 요구하는 SNS 활동과 방송의 영향이 크다. 또래들 만 알 수 있는 은어, 뜻을 알기 힘든 줄임말, 국적 불명의 신조어, 비속어 등을 무분별하게 남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방송사 예능 프로그램과 유튜브 동영상의 자막은 위험수위에 올라 있다. 예능 자막은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시청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재치 있는 문구로 연출자와 시청자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의 자막들은 한글 오남용을 부추겨 바른 언어 사용을 가로막는 걸림돌처럼 보인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펄벅 여사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총, 균, 쇠’의 저자인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한글을 ‘가장 독창적이고 합리적인 문자’라고 극찬한 바 있다. 또한 세계화·정보화 시대에 정보 전달력이나 자판 입력 속도 측면에서 전 세계 수천 종의 언어 체계 중 가장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소통 도구가 한글이라는 평가도 잇따른다.

세계인들이 BTS의 노래를 감상하기 위해 우리말을 익히고 있다는 소식은 이제 뉴스 거리도 아니다. 음악, 영화, 드라마 등 한류 콘텐츠가 뜨면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세종학당도 덩달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 나라의 언어나 문화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들이 뒤섞이고 충돌하는 가운데 새롭게 생성되는 잡종성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한류’나 ‘K-콘텐츠’의 기반이 한국어라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훈민정음 반포 576돌을 기념하는 한글날을 앞두고 우리말과 우리글의 가치를 돌아봐야 할 때다. 세계의 석학들과 언어학자들은 한글을 으뜸이라고 칭찬하는데 한국 사람들 스스로 그것을 짓밟고 훼손해서야 되겠는가. 글과 말이 다르다고 하지만 그 뿌리는 같다. 글이든, 말이든 즉흥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표현을 삼가고 언어 사용의 품격을 높이는 데 힘써야겠다.

임채성(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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