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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970) 경약신명(敬若神明)

- 신명처럼 존경한다

기사입력 : 2023-03-07 08:10:27

어떤 대학원생이 강의 끝나고 나면 책을 ‘콱’ 덮어 ‘팍’ 밀쳐버렸다. 번번이 그랬다. 어느 날 한참을 쳐다보았더니, 눈치를 챘는지 미안해했다. 어린 학생도 아니고, 상당한 경력이 있는 중견 교사였다. 그래서 필자가 상당히 길게 빙 둘러 훈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 도산서원(陶山書院) 가 봤지요? 아랫부분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께서 학문 연구하고 제자 가르치던 도산서당입니다. 마루 한 칸, 방 한 칸, 골방 한 칸으로 되어 있는데, 방 한 칸은 연구실 겸 도서실인데, 아무리 피곤해도 그 방에서 발을 뻗거나 눕지를 않으셨어요. 사방에 책이 꽂혀 있기 때문입니다. 책을 생명체로 생각하고 신명(神明)처럼 공경했습니다. 그 속에 성현이나 선배 학자들의 말씀이 들어 있는데, 그 앞에서 어떻게 감히 발을 뻗거나 눕는 등 함부로 행동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에서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선생은 책만 그렇게 대한 것이 아니라, 매화는 ‘매화 형님[梅兄]’, 연꽃은 ‘깨끗한 친구[淨友]’, 매화 소나무 국화 대나무 등은 ‘절개 있는 벗들[節友]’라고 했습니다. 모든 식물에 인격을 부여한 것이지요. 사람만 존귀한 것이 아니고, 식물도 소중하고, 무생물도 소중하고, 천지만물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퇴계선생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유학자들이 모든 사물을 다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곧 모든 물건에는 정신[物靈]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원생이면 전공 학문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바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바르게 행동하는 것은 책을 소중히 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책 한 권은 어떤 명품(名品)보다 더 귀중한 것입니다. 책 한 권은 1만원, 2만원 정도 주면 사지만, 그 속에는 그 저자의 한평생의 학문과 사상과 경험과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그 저자가 60년 70년 공부해서 경험해서 얻은 지식과 교훈을 여러분들은 가만히 앉아서 단돈 1~ 2만원에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이 세상에서 책보다 더 귀중하면서도 싼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책을 천대하면 공부가 안 됩니다. 책을 던지면 안 됩니다. 책을 깔고 앉아도 안 됩니다. 책을 밟거나 뛰어넘으면 안 됩니다. 책을 베고 자도 안 됩니다. 책을 접어서도 안 됩니다. 책 위에 다른 물건을 얹어서도 안 됩니다. 물론 책을 더럽혀도 안 됩니다. 혹 책이 더럽혀졌거나 손상되었으면 즉각 보수해야 합니다.

내 자랑이 되겠지만, 나는 책을 지극히 소중히 생각합니다. 책을 밟거나 깔고 앉는 것은 생각도 못 합니다. 길 가다가 대학생들이 써 붙인 대자보도 안 밟고, 길 위의 교통 규칙도 안 밟습니다. 글자가 인쇄된 종이는 휴지로도 안 씁니다. 책이나 글자를 예사로 자근자근 밟는 학생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책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쓰는 지우개나 책받침 등도 다 귀한 사람처럼 대접합니다.” 이에 대학원생들이 숙연해졌다.

* 敬: 공경할 경. * 若: 같을 약.

* 神: 귀신 신. * 明: 밝을 명.

허권수 동방한학연구원장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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