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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바라든 바라지 않든- 이철웅(시인)

기사입력 : 2023-03-23 19:23:17

운명이란 게 정말 있는 걸까. 나는 운명이란 것에 다소 부정적이다. 어디까지나 맞닥뜨리는 환경에서 비롯된 도출 값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다.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우리는 잊고 지낸 경험과 현재의 생활 선상 위에서 문득 이것은 나의 운명이려니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란 단계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바라든 바라지 않든, 한 단어로 정의될 때가 있다.

굳이 다양한 사람들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당장 나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다. 나는 다양한 직종을 오가며, 생계를 유지했다. 여름에는 공장에서 일하다, 겨울이면 방송국 로비에서 출입증을 찍으며, 방송 준비에 몰두했다. 다음 해는 찌는 더위 속 맨홀 뚜껑을 망치로 두드려, 열어 오물을 보며, 그것들이 지나가는 도면을 그렸다. 카페에서 일할 때는 비싼 잔을 여럿을 깨 먹었다. 몇 달간의 실력이 쌓이면서, 나름의 인정을 받는 일꾼이 됐지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고 해고해버리는 곳들도 있었다. 단순히 생활비를 벌기 위해 했던 생존 수단이, 나를 대변하진 않았다. 끝없이 다변하는 삶 속에서 변하지 않은 부분만이 나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말이었다. 나의 경우엔 문학의 문을 계속해서 두드렸고, 지금의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관된 선택에서부터 글 쓰는 사람으로 정의되고 있었다. 그럼 나머지 선택들은 의미가 없다고 치부해 버려야 할까? 빠르게 답을 하자면 ‘아니다.’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머물렀던 것들은 주로 계약직이거나, 그만큼 안정적이지 못한 곳들이지만, 살아가기에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 다양한 궂은일들은 마치 나라는 사회적 인간을 길러낸 요람인 듯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줬다. 그 경험들이 쓸모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우선 나는 말할 수 있는 말이 아주 많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걸어왔던 발자취만이 세상 전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어느새 재밌게 이야기할 거리가 쌓여 있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그 이점은 내가 글을 쓸 때 매번 궤도를 달리하는 위성과 행성을 바라보듯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즉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에 좋은 ‘푼수’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점들이 글을 쓰기에 좋은 양분이 됐지만, 분명히 밝히자면 개인적으로 다양한 경험만이 글을 쓰기 위한 방도가 아님을 말하고 싶다. 글이란 결국 입 밖으로 한 번은 발음되어야 살아난다. 그렇기에 비교적 적은 산물이라도, 나름의 공식이 적립된 이에겐, 아주 좋은 말놀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가끔 천재처럼 보인다. 결국, 살아가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비약해서 말해본다. 이것이 내 나이 때에 하는 단순한 착각일지언정, 다양한 것들만이 살아가는 것에 필수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남들보다 다양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단순히 운명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아깝기 때문이다. 매 순간순간 선택의 흐름에서 일관된 교차점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더 자주 웃어주고, 뜨겁게 악수하는 따뜻한 사람이 되어도 좋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그 뒤에서 든든히 받쳐주는 등대 같은 사람이 되어도 좋다. 그런 사람들은 각자 다른 삶을 살아왔겠지만, 바라든 바라지 않든 우리는 그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부를 테니까.

이철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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