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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작약 꽃 같은 사람들- 유승영(시인)

기사입력 : 2023-05-25 19:08:42

산수유가 지고 작약이 붉게 올라왔다. 작약을 보면 곧 여름으로 가는 길목임을 알아차린다. 지리산 근처에서 집을 짓고 5년 정도 살았던 적이 있는데 마당을 지나면 대문 옆에 작약 한 무더기가 피고 지고 했었다. 봄을 지내는 동안 잎을 틔우고 꼭꼭 숨어서 더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며 몸 단장을 하는 작약이었다. 봄의 흙을 뚫고 가지와 순을 밀어 올려 끝내 한 소쿠리의 꽃을 피워내는 작약이다.

이번 봄은 유난히 신이 나고 들떠있다. 모두가 코로나의 팬데믹을 지나 한결 자유로워진 모습들이다. 마스크를 집어 던지고 어디로든 떠나도 좋을 차림이 우리를 설레게 한다. 모두에게 수고했다고 등을 톡톡 다독여주고 싶다. 휴식 같기도 감옥 같기도 한 팬데믹을 잠시 접어두고 봄을 맞이했다. 우리들의 중심을 든든히 세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대충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각오와 결단의 시간이기도 했다. 가벼운 병원 치료도 병원 밖에서 발을 동동 굴려야 했고, 간단한 외출조차도 생각에 생각을 해야 하는 시간으로 새삼스러운 기다림을 배웠다. 작은 것 하나에도 간절함이 필요했고 그냥 얻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살아가는 동안 이런 무시무시한 팬데믹이 지구촌에 닥칠거라고 예상할 수 없었기에 더욱 소중했던 시간이다.

알싸한 바람을 앞질러 어디로든 걸어보는 오월이다. 계절을 잊은 기온이지만 세상 처음 맞는 계절처럼 5월이 가슴 벅차게 지나고 있다. 어디쯤에서 코로나가 숨어 있을지라도 어딘가에 코로나가 주춤하고 있을지라도 우리에겐 새로운 봄이다. 나도 모르게 마스크를 챙기고 나도 모르게 코와 입 주변이 어색해서 손이 올라가고, 드러내 놓은 얼굴이 허전하지만 오월을 힘 있게 걸어본다. 마스크가 방패였고 가림막이었듯이 우리를 지켜내는 일은 지금부터는 미뤄놓았던 것을 꺼내어 펼쳐보는 일이 아닐까.

나는 아이들과 시를 읽고 시를 쓴다. 아이들과의 시간은 깨어있는 나를 다시 깨워주는 시간이다. 중학교 국어 시간이 나는 참 좋았다. 다른 과목은 몰라도 국어 선생님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선생님 찾기를 몇 년간 하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나는 시인이 되었다. 봄 소풍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이후 가끔씩 글쓰기 대회에 나갔던 것도 같고, 뭐가 뭔지도 모르고 써 낸 봄 소풍 삼행시가 장원이라니 참 놀라웠다. 나는 나이 마흔에 시인으로 등단을 했다. 김언희의 시집을 만나고 강성은을 읽고 진은영을 읽고 김혜순을 읽고 마구잡이로 읽기 시작한 것이 詩다. 신해욱과 이장욱을 이근화와 김행숙을 읽고 이원과 황인숙을 그리고 백석을 읽고 허수경과 이수명을 읽고, 김수영과 황지우를 읽고 황병승을 읽고 이성복의 흐트러짐 없는 질서와 혼돈은 갈팡질팡의 내 정신을 두 동강 내주었고 황인찬을 비로소 만나고 변방에 있는 나를 찾아내어 시인 K로 살게 해 준 성윤석이 있다.

작약이 꽃잎을 피워내는 오월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약이다. 꽃송이가 커서 눈길이 가는 꽃이다. 꽃잎 한 장을 펼치면 글이 쓰고 싶을 것 같은 작약이다. 부드러우면서 단단한, 단단하면서도 우아하며 차가운 듯 따뜻한, 언니같이 환한 작약이 피었다.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삶의 자세와 태도까지 배울 수 있었던 이규리 시인이 있다. 늦은 등단과 늦은 시집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시던 나의 스승 이규리 시인을 꺼내 보는 푸르고 푸른 오월이다.

유승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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