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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외상값을 갚고

독자투고 | 조영봉 | 2020.12.18 16:06:36
요즈음은 상점이나 슈퍼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려면 현금이나 카드가 있어야 살 수 있다. 돈 없이 외상으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대출을 받든지 빌려서라도 돈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보릿고개 있던 어려운 농촌에는 대출할 곳도 없고 돈을 빌려줄 사람도 없다. 거의 자급자족했지만 필수 생필품은 외상거래를 하였다. 농사가 주류였던 시절 가을 수확을 해서 장에 팔아야 돈을 만질 수 있다. 그렇다고 일상적으로 드는 필수 생필품을 가을까지 안 쓸 수 없기에 장부에 적어 놓고 외상으롸 갔다 썼다. 농기구나 호롱불에 넣는 등유는 자급자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흉년이 들면 외상값 갚고 나면 별로 남는 것이 없어 보릿고개의 연속이기도 하였다. 나는 성장하면서 어머니가 커서 돈 벌면 동네 누구누구 아주머니께 밥도 사주고 외상값 갚으라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 듣고 자랐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었고 직장 잡아 돈을 벌었지만 살기에 바빠 까먹고 지냈다. 환갑을 맞이하여 손녀를 보면서 그 말이 생각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손이 귀한 집안에 아들을 하나 더 낳아 보려고 마흔 중순에 아들을 얻기는 했지만 이미 젖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처럼 분유가 있는 시대도 아니고 참 기가 막혔을 것이다. 동네 공동 우물가 근처 집에서 태어난 나는 배가 고프면 동네가 떠나가게 울었다고 한다. 그 어머니 심정이 어쨌을까? 배고프면 잠시도 못 참는 손녀를 보며 그 심정을 새삼 느꼈다. 동네가 떠나가게 하도 크게 울기에 물길로 온 아이 가진 아주머니들이 잠시 젖을 물리고 갔다고 하였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젖과 일찍부터 암죽을 먹고 자랐고 특히 누구누구 어머니는 꼭 새벽에 와서 잠시 먹여 주고 갔다고 하였다. 자식 낳아 키우고 철이 들어 고향에 찾아보니 어머니가 말한 그분들은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그냥 동네에 남아 계신 어른분들과 그 자녀들에게 벌초 때나 오갈 때 식사 몇 번 사 드린 것으로 어머니가 말한 빚을 다 갚았다고 생각하고 지냈다. 그러다가 손녀가 배가 고프면 자지러지게 우는 모습을 보면서 머리가 띵했다. 어른들이 한 말들이 생각났고 배고픈 것 못 참는 것은 할아버지 닮았다는 소리에 더 그랬다. 부모 애먹이고 속 태운 것 갚지 못한 것은 자식과 손녀에게 갚으면 되지만 남한테 받은 것은 무엇으로 갚아야 하는지 난감했다. 분유가 없던 시절엔 젖은 흰 피라고 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빚졌으니 말이다. 요즈음이야 모유보다 영양 좋은 분유가 있지만, 그 당시 돈으로도 사지 못하는 모유를 얻어먹고 자랐는데 그 고마움과 은공을 잊고 지냈고 그분들이 없다고 그냥 지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것을 그분들은 아낌없이 나누었는데 난 무엇을 했을까?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해 보니 헌혈밖에 없었다. 예비군 시절에 헌혈하면 훈련 한나절 면제시켜 주어서 하기도 하고, 젊은 시절 헌혈차 오면 군중심리에 덩달아 하고, 가족이 수술해서 헌혈이 모자랄 때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타의에 의해서 한 것이 주류였다. 이후 헌혈에 대한 부담과 부작용도 있다고 하여 그리 쉽게 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염려했던 것들도 기우였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빚지고 빚 갚으려고 환갑 나이에 시도해 보니 까다롭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몸 관리 잘해야 하고 헌혈에 금지하는 먹는 약도 안 먹어야 하고 몇 달을 공을 들여 건강과 몸을 만들어 헌혈 검진에 통과되었다. 숭고한 모유를 외상으로 먹은 것을 이자까지 갚지 못해도 몸 관리 잘해서 내가 갚을 수 있는 날까지 갚아 보려고 한다. 요즈음은 건강관리 차원에서 전혈은 한번 하면 두 달 이후에나 헌혈이 된다. 손녀 태어나고 이제 세 번 했으니 언제 다 갚을지 까마득하다. 그렇지만 몸 관리 잘해서 갚을 수 있는 날까지 갚아 봐야겠다. 2020. 11. 24. 화 경남도민 조영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