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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독립운동단체 ‘창원 흑우연맹’ 재조명한다

기사입력 : 2024-05-27 20:34:11

1928년 아나키스트 연대 비밀단체
경남도, 당시 판결문·집행원부 확보
유일하게 서훈 받은 박창오 제외
주동자 조병기 등 6인 유공자 신청


1920년대 후반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국가권력인 일제에 저항하는 ‘아나키즘’이 성행했다. 무정부주의 ‘아나키즘’의 상징은 흑(黑). 아나키스트들이 모여 연대한 비밀단체는 ‘흑우(黑友)연맹’이라 불렸고, 이제는 잊혔지만 창원에도 흑우연맹은 존재했다.

흑우연맹의 전신은 ‘흑우회’다. 영화로도 유명한 독립운동가 박열 선생 등이 1923년 일본 도쿄에서 조직한 비밀단체다. 흑우회는 1928년 1월 흑우연맹으로 개칭하고 한반도로 활동을 넓혀갔다.

흑우연맹 주동자인 조병기씨가 재판기록 등을 공개한 1974년 11월 28일자 경남매일(경남신문 전신) 지면./경남신문DB/
흑우연맹 주동자인 조병기씨가 재판기록 등을 공개한 1974년 11월 28일자 경남매일(경남신문 전신) 지면./경남신문DB/

창원 흑우연맹은 1928년 5월 결성된다. 조병기(趙秉基)·손조동(孫助同)·김두석(金斗錫)·박순오(朴順五)·박창오(朴昌五)·김두봉(金斗鳳)·김상대(金相大)씨 등 7인이 중심이 됐다.

이들 비밀결사체는 독서구락부를 조직해 아나키즘 이론을 연구하며 창원 지역에 항일독립운동 사상을 선전해 오던 중 1년 뒤인 1929년 5월 검거돼 9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 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받은 박창오·박순오씨는 출옥하자마자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적용된 혐의는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이들끼리 상해임시정부 현황을 이야기하던 편지가 적발된 게 원인이 됐다. 투옥 4개월 뒤 열린 예심에서는 증거불충분으로 면소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담당검사가 판결에 불복, 항고하면서 투옥기한이 연장됐다.

흑우연맹은 경남신문과도 관련이 많다. 전 마산일보 (경남신문 전신) 사장인 목발 김형윤 선생은 20대 시절 흑우연맹과 지속 교류해 온 인물이다. 김 선생 또한 일본 유학 당시 흑우회에 가맹한 아나키스트였다. 흑우연맹 주동자 중 한 명인 조병기씨와는 사상적 동지이자 라이벌로 불렸다.

또 1974년 11월 28일자 경남매일(경남신문 전신) 지면에 조병기씨가 당시 재판기록과 경찰기록문서를 공개한 기사가 담겨 창원 흑우연맹을 지역사회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조병기씨는 1920년대 창원공립보통학교와 합천초계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교육에 힘쓰다 파면 처분을 받았다. 이후 조선일보 지국기자로 활동했다. 조씨는 독립유공자 신청을 끝내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또 다른 주동자인 김상대씨는 2002년 가족이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공적심사에서 탈락했다. 당시 언론자료와 조선총독부 부산지방법원 예심종결결정서 등 관계 증빙자료만으로는 부족했다.

출옥 직후 숨진 박창오씨는 2023년 끝내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았다. 흑우연맹 7인 중 유일한 사례다.

경남도는 최근 국가보훈부에 박창오씨를 제외한 흑우연맹 6인에 대해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했다. 도는 이들의 독립운동 활동을 입증하기 위해 1929년 당시 창원 흑우연맹 사건을 다룬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 ‘판결문’과 ‘집행원부’를 확보했다. 또 관련 신문기사와 논문을 분석, 이들의 활동을 항일독립운동의 관점으로 재조명하는 공적서를 작성했다.

일제에 대항한 무정부주의자들은 대한민국 정부를 반겼다. 정부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1987년 1월 여진 마산일보 전 편집부장은 조병기씨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독립유공자 신청했습니까.”

“이미 지나간 일 뭐하러 그럽니까? 정부에서 해주겠다고 해놓고 이 서류, 저 서류 가지고 오라… 이젠 정말 그만둘랍니다.”

조병기씨는 그로부터 보름 뒤 숨을 거뒀다.

김용락 기자 rock@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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