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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쇠한 영웅들’ 마지막까지 지키는 ‘숨은 지원군’

경남 6·25참전유공자지회 사무국·과장

[6·25전쟁 74주년 기획] 참전용사 곁에 머무는 사람들

기사입력 : 2024-06-24 21:00:35

93세.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평균 나이다. 태극기를 가슴 속에 품고 싸웠던 시대의 영웅들, 그들이 결국 이기지 못한 건 70여년이란 세월뿐이다. 잦아진 진혼곡, 줄어든 생존자 그리고 관심.

그러나 노쇠한 영웅들 곁에 머무는 사람들이 있다. 주 업무는 딱딱한 서류 작업이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말동무가 되는 동료부터 건강을 걱정하는 자식으로서 함께 한다. 6·25전쟁 74주년을 맞아 경남 도내 18개 시·군(창원시는 3개 지회)의 6·25참전유공자지회 사무국·과장들을 만나 보았다.

김재하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 사무국장이 24일 의창구 창원보훈회관 5층 지회 사무실에서 황광주 6·25 참전유공자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고 있다./김승권 기자/
김재하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 사무국장이 24일 의창구 창원보훈회관 5층 지회 사무실에서 황광주 6·25 참전유공자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고 있다./김승권 기자/

참전용사들 고령화로 업무 부담
유공자 자녀·봉사자가 맡아
평균 나이 61세… 85세 최고령도
20명 중 7명은 근무기간 10년 넘겨

◇봉사, 그보다 더한 고마움= 도내 6·25참전유공자지회 사무국·과장 20명의 평균 나이는 61세다. 41세부터 시작해 85세에 활동하는 과장도 있다. 이들의 평균 경력은 7년. 그중 7명은 10년을 넘겼고, 16년간 근무 중인 분도 있다. 이들은 모두 외부인이다. 10여년 전만 해도 지회 회원인 6·25참전용사가 사무직을 맡았지만, 현재는 고령화의 영향으로 20명 모두 회원이 아니게 된 지는 오래됐다.

대다수는 봉사와 관련이 깊다. 봉사활동을 하며 알게 된 인연이 사무국·과장 자리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들은 봉사를 넘어, 나라를 지켜 준 것에 대한 감사함과 고마움으로 이 일을 이어가고 있다.

김재하(66) 창원시지회 사무국장은 지난해 3월 이 일을 시작했다. 교사 재직 시절부터 30년 넘게 봉사에 헌신한 덕에 업무는 부담스럽게 다가오지 않았다. 되려 자처해서 일을 더 해나가고 있다. 아버지가 6·25전쟁 참전유공자였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6·25전쟁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죠. 그 영향으로 저와 아들도 ROTC에 들어가는 등 가족 전체가 군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어요. 이 일을 맡게 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컸죠.”

참전용사들을 모실 때마다 5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른다는 김 사무국장. 나라를 지키고 어렵게 자식들을 키워냄에 대한 감사함은 존경심 가득한 행동으로 발현되고 있다.

남해군지회는 2014년까지 지회 회원이 사무과장을 맡았었다. 더 이상 연로한 참전용사들이 업무를 볼 수 없게 되자 외부인인 정옥례(73) 사무과장이 출근을 시작했다.

업무를 시작한 10년 전에도 이미 정년을 넘긴 나이. 정 사무과장은 현재 70을 넘은 고령이지만 매일 사무실로 출근한다.

“불편한 몸에도 직접 사무실로 찾아오는 참전용사분들이 있어요. 전화를 해도 된다고 알려줘도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하시죠. 나라를 지킨 분들에게 괜한 헛걸음을 시킬 수 없기에 매일 상근하고 있어요. 당연히 해야 할 예우 아닐까요?”

“봉사 넘어 존경·고마움으로 지속
이 일이 남은 운명이라 생각하고
영웅들의 마지막 함께 맞이할 것”

◇마지막까지 함께 하기로 한 ‘약속’= 올해로 66세인 이향순 합천군지회 사무과장은 지난 9년간 이 일이 귀찮거나 힘들다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전쟁의 아픔과 희생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이 사무과장의 아버지는 6·25 참전용사, 오빠는 상이군경, 여동생의 남편은 전몰군경이다.

‘내가 죽더라도 한 분이라도 남아 있을 때까지 보살펴주길 바란다.’ 몇 년 전 유명을 달리한 전 지회장의 부탁. 그 부탁은 약속이 되어 이 사무과장을 움직이게 만든다. 이 사무과장은 이 일이 남은 운명이라 생각하듯 고민과 미래를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는 말로는 소통이 어려워 글을 써서 대화해요.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생각해요. 끝까지 할 겁니다. 몇 년이 될진 모르지만 영웅들의 마지막이잖아요. 누구라도 한 명은 곁에 있어야죠.”

문덕순 통영시지회 사무과장은 28년 전인 1996년부터 지회를 도왔다. 봉사 개념으로 도우던 일은 2010년 사무과장이 되면서 정식 업무가 됐다. 그렇게 올해 71세가 됐다.

그동안 수많은 참전용사들의 유공자증을 발급해 주고 훈장도 찾아줬다. 처음에는 봉사의 마음이었고, 지금은 깊은 정이 가득하다. 그가 하늘에 새긴 참전용사의 이름은 이제 헤아릴 수 없다. 2000년대 초 1200여명이던 지회 회원은 오늘날 60여명으로 줄었다.

“통영에서 나이 든 사람도 굴 까러 가면 한 달에 최소 200만원은 벌어요. 이 일은 푼돈이죠. 돈 때문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하지만 누군가 해야 해요. 어르신들이 아니었으면 지금 우리가 삼시 세끼 잘 먹고 살 수 없었을 거잖아요.”

올해 도내 6·25유공자 1791명
10년 사이 7935명 세상 떠나
회원 없다는 이유로 존폐 위기
유족에 회원 자격 승계 목소리도

◇기억되고 기록돼야 할 영웅들= 20명의 사무국·과장들이 입 모아 말하는 게 있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들은 담담하게 참전용사들의 마지막을 함께 맞이하려고 한다. 가능하다면 최대한 늦게, 천천히.

2024년 경남 도내 6·25전쟁 참전유공자는 1791명. 10년 전인 2015년(9726명)과 비교하면 10년 사이 7935명(81.6%)의 참전용사가 세상을 떠났다. 앞으로 10년 뒤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곧 단체는 회원이 없다는 이유로 존폐 위기에 처한다. 여전히 휴전인 상태이지만 그 시대 나라를 지켰던 모든 영웅들이 사라진다. 사무국·과장들이 수년 전부터 그 이후를 걱정하고 있는 이유다. 그동안 참전용사들이 맡아왔던 호국 안보정신 계승 작업이 끊길 것이라는 우려다.

대안 중 하나는 6·25유공자회 회원 자격을 유족들에게 승계하는 것이다. 사무국·과장 중 다수는 참전용사의 자녀들이기에 공감하는 의견이 많다. 다만 매번 법안은 논의되고 있지만 감감무소식, 아니 깜깜무소식이다. 이들에게 들리는 소식은 이별이란 비보뿐이다.

김재하 창원시지회 사무국장은 호소한다. “유족들에게 단 한 푼의 명예수당도 주지 않아도 된다. 대한민국을 지켰던 영웅들이 후대에도 기억될 수 있도록 힘쓸 사람을 찾자는 거다. 지회를 유족들로 유지한다면 충분히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국회를 포함한 중앙에서는 움직임이 없다. 더딘 움직임 속에서 현장의 시간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김용락 기자 rock@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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