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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참사 그리고 1년, 끝나지 않은 고통

보상금 갈등·사고 트라우마…‘밀양의 악몽’은 현재진행형

기사입력 : 2019-01-24 22:00:00


2018년 1월 26일, 기록적인 한파로 밀양의 아침은 얼어붙은 듯 고요했다. 작은 도심의 적막을 깬 것은 소방차들의 사이렌 소리였다. 거대한 화마가 덮친 세종병원 안팎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불을 끄려는 사람, 불길을 뚫고 누군가를 구하려는 사람, 불을 피한 사람과 불을 피하지 못한 사람,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이웃들이 뒤엉키면서 병원 주변은 흡사 전쟁터 터를 방불케 했다. 불은 기어코 45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그때 병원 안팎에서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던 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밀양참사 1주기를 맞아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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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세종병원 화재 참사 1주기를 앞둔 23일 깨진 창문 너머로 보이는 병실에 적막이 흐르고 있다./성승건 기자/

◆유족들의 참사는 여전히 진행 중= 그날 박미영(29·여·가명)씨는 엄마를 잃었다. 세종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근무했던 엄마는 교통사고로 팔과 다리를 다쳐서 병원에 한 달간 입원해 있었다. 박씨는 출근길에 불이 났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도, 엄마를 찾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때도, 전혀 엄마의 죽음을 예상치 않았다. 팔다리가 불편했지만 건강했고, 10년간 일한 병원이라 쉽게 탈출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존자와 부상자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길 몇 시간이 흘렀을 때 엄마를 찾았다는 전화가 왔다.

“영안실에서 누워계신 엄마를 보는 순간 너무 황당해서 눈물도 안 나더라고요. 1년 동안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기가 가장 힘들었어요. 지난 14일 엄마 첫 제사를 지냈는데도, 아직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거짓말 같을 때가 있으니깐요.”

박씨는 엄마를 떠나 보낸 지난 1년을 지옥 같았다고 회상했다. 슬픔을 채 수습할 시간도 없이 보상금 문제에 직면했다. 가족에게는 세상 누구보다 예쁘고 소중한 엄마였다. 게다가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기도 했다. 병원측이 제시한 합의금 3000만원을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할머니와 아픈 아버지, 그리고 두 동생을 둔 장녀인 박씨는 고민 끝에 지난 7월 병원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시작했다. 피 말리는 시간이 지나고 지난 12월 법원은 병원이 가족에게 1억200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박씨와 가족들이 보상금을 실제 받을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세종병원을 운영한 효성의료재단은 돈이 없고, 병원 건물이 경매에 나와있지만 이미 직원들과 은행·건강보험공단·시청 등에서 가압류 및 구상권을 신청한 상황이라 보상금을 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게다가 밀양시청은 재단에서 보상금을 받지 못한 14명의 유족들에게는 병원 측에 구상권을 청구하고 보상금을 지급했지만, 소송을 진행한 유족들은 예외라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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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명의 목숨을 앗아간 밀양 세종병원 화재 참사 1주기를 앞둔 23일 소송을 진행 중인 유족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박씨는 “판결이 난 걸 알면서도 세종병원측에서는 연락도 오지 않고, 답답한 마음에 시청에 연락했지만 시청에서는 소송을 진행한 유족들에 대해서는 해줄 것이 없다고만 말하고 있다”며 참사가 발생했을 때는 국가도 밀양시도 모두 관심이 많았는데 정작 법원의 보상 판결을 받아도 관심을 기울여주거나 책임지는 곳이 없어 막막하고 허탈하다”고 말했다.

밀양시에 따르면 밀양참사로 숨진 45명의 유족 중 40명은 병원측과 위로금 등의 명목으로 합의금(3000만원)을 받고 합의했다. 박씨를 포함해 5명의 유족은 소송을 진행했고, 이번에 첫 판결이 나긴 했지만 모두 보상금을 받을 길이 없다는 상황은 같다.

소송을 진행 중인 또 다른 유족 문모씨는 “사랑하는 조카를 보낸 뒤 아이의 아버지는 충격으로 쓰러져서 현재 병원에서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고, 어머니도 충격이 커서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힘들게 살아내고 있는데, 소송하는 유족들에 대해서는 배려하지 않는 시의 태도를 보면서 더 상처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유족들 사이에서도 각자 다른 목소리가 나오면서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합의금을 지급 받은 일부 유족들이 합의 진행 과정과 보상금 규모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3일 일부 유족들은 모임을 통해 “큰 참사였는데도 희생자 대부분이 고령이라는 이유로 희생자와 유족들을 대하는 정부와 시의 태도가 너무 무관심하고,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제천화재와 비교했을 때 모든 부분이 형평성에 맞지않다”며 “왜 이렇게 일이 진행됐는지 살펴보고, 시와 정부에서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촉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유족들은 오는 26일 세종병원 주차장에서 1주기 추모식을 진행한 뒤 유족총회를 통해 이같은 논의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병원측의 화재 책임을 묻는 재판은 현재 진행 중이다. 효성의료재단 이사장 A(57)씨와 병원장 B(54)씨, 총무과장 C(39)씨, 행정이사 D(60)씨 등 4명은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으며, 오는 2월 1일 선고 공판을 앞두고 있다. 앞서 검찰은 결심공판에서 A씨에게 징역 12년, B씨에게는 징역 3년, C씨에게는 징역 5년을 구형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오늘도 참사 현장을 살아내는 주민들= 밀양시 가곡동 주민들은 그날의 참상을 가슴속에 담고 있지만, 쉽사리 입밖에 내지 않는다. 일종의 금기였다. 한 집 건너 아는 사람들을 떠나 보낸 이들은 1년 전 참사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23일 찾은 밀양 세종병원은 지난해 화재로 시커멓게 그을렸던 외벽이 회색 페인트로 단장돼 있었다. 병원 앞을 오가는 시민들에게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굳게 둘러진 펜스, 끊어진 폴리스라인, 타다 만 전기선을 통해 참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화재 당시 세종병원과 인접한 밀양지역자활센터에서 부상자 구조 활동에 나섰던 유상아 실장은 심리치료와 약물치료를 받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쉴새없이 병원 밖으로 나온 구조자들은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지지 못하고 인근 자활센터, 경로당, 장례식장에 임시로 옮겨졌다.

유 실장은 2018년 1월 26일을 “잊고 싶은 기억”이라고 말하며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유 실장은 “직원과 부상자들을 자활센터로 옮겼다. 아마 지난해 가장 추운 날이었다. 떨고 있는 부상자들의 몸에 핫팩을 정신없이 붙였다. 누가 부상자인지 사망자인지 판단할 수도, 진단을 내려줄 사람도 없었다. 그저 따듯하게 해주는 방법밖에는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구조 활동에 참여했던 대원들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소방관 가운데는 화재로 가족을 잃은 이도 있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끝까지 구조 활동을 이어갔다. 밀양소방서 관계자는 “많은 시민들이 세종병원 화재로 운명을 달리했다. 당시 구조 활동에 참여했던 대원들의 가족 중에서도 화마를 피하지 못한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구조대원들도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고 있다. 입밖으로 얘기도 꺼내지 않는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원들의 트라우마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고 말했다.

밀양시에 따르면 지난 1년간 밀양참사로 인한 트라우마로 밀양보건소에서 총 2859건의 심리상담이 진행됐었다.

화재 이후 사람들이 떠나버린 거리를 지키는 병원 인근의 주민들과 상인들은 쓸쓸함을 토로했다.

가곡동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이중기(72)씨는 “세종병원은 입밖으로 꺼내기 아픈 기억이다”면서도 “밀양에서는 제법 큰 병원이었고 많은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오가면서 활기가 있었는데 도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다니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고 말했다. 노점을 운영하는 이옥련(66·여)씨는 “예전 같으면 병원에 오는 사람들로 오후 5~6시까지 붐볐는데 지금은 휑하다”며 “사람 몇 안되는 동네에서 큰 병원이 문을 닫아버리니 주변 상권이 다 죽었다”고 말했다.

반면 세종병원 주변에서는 참사의 흔적을 치유하기 위한 작은 노력들도 엿볼 수 있었다. 세종병원을 증축하기 위해 마련된 병원 옆 부지는 1년 전 터파기 공사가 중단되면서 흉물로 방치돼 있었지만, 밀양지역자활센터가 나서 텃밭과 임시 주차장을 조성했다. 지나가는 시민들로 하여금 참사의 아픈 기억을 조금이나마 치유하기 위해서다.

박종근 밀양지역자활센터장은 “많은 이들을 화재로 떠나보내면서 밀양 시민들은 지역사회에 대한 일종의 도의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다”며 “잊고 싶은 기억이지만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슬픔을 딛고 일어날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조고운·박기원 기자 luc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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