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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창원 전통주 지킴이 허승호 전통주 이야기 대표

자부심 가득한 전통주 꿈꾸는 ‘술 빚는 산적’

기사입력 : 2023-09-20 20:28:25

“한국의 전통주는 뭘까요?”

인터뷰 시작부터 말문이 막힌다. 막걸리나 소주가 정답은 아닌 것 같아 꾸물거리자 허승호(57) 전통주 이야기 대표가 싱긋 웃으며 말을 잇는다. “우리 조상들이 우리 땅에서 난 재료로 빚었던 술입니다.” 머릿속은 더 복잡해진다. 도대체 우리 선조들이 즐겨 만들어 먹던 술의 정체가 뭐였단 말인가. 아리송한 표정을 본 허 대표가 더 상세하게 풀어내 정의한다.

“인공적인 재료 없이 우리 쌀과 우리 누룩, 물을 사용해 빚은 술이죠. 조선시대까지 우리 나라에서는 집집마다 가양주(家釀酒)를 빚어 먹었는데, 일제강점기 강제로 맥이 끊겼거든요.”

허 대표는 일제강점기 이후 100년간 단절된 전통주 문화를 다시 잇기 위해 창원 북면에서 매일 전통주를 빚고 있다. 그가 작은 술잔에 따라주는 국화주 한 잔을 입 안에 머금어 본다. 향긋한 꽃 내음이 코를 스치더니 단맛과 신맛, 고소한 감칠맛까지 내는 한 잔이 부드럽게 목을 넘어간다. “우리 곡물로만 만들었는데도 향신료를 넣은 것처럼 다양한 맛이 나죠? 그게 우리 전통주의 진짜 매력입니다.” 자부심이 담긴 단단한 목소리다.

허승호 ‘전통주 이야기’ 대표가 창원시 의창구 북면의 전통주 이야기 숙성실에서 옹기에서 익어가는 다양한 전통주를 살펴본 후 환하게 웃고 있다./김승권 기자/
허승호 ‘전통주 이야기’ 대표가 창원시 의창구 북면의 전통주 이야기 숙성실에서 옹기에서 익어가는 다양한 전통주를 살펴본 후 환하게 웃고 있다./김승권 기자/

마흔 중반 전통주 매력 느껴 공부 시작해
2018년 창원 북면에 전통주 제조공간 열어
강좌 등 통해 400~500명에 주조기술 가르쳐
군항제·국화축제에 전통주 없어 안타까워
지난해부터 사비로 ‘창원전통주대회’ 개최

◇창원 북면의 전통주 이야기

허승호 대표는 ‘창원의 전통주 전도사’로 불린다. 지난 2018년 창원 북면에 전통주 제조 및 강의 공간인 ‘전통주 이야기’를 열고 지난 5년간 전통주 강좌로 24개 기수를 배출했다. 외부 강의까지 합치면 어림잡아 400~500명이 그에게 창원지역의 재료로 전통주 만드는 기술을 배운 셈이다. 이들은 2020년부터 매년 대한민국 명주대상, 대한민국창도주 선발대회 등에서 전국구로 상을 휩쓸고 있다.

“우연히 전통주를 접하고 그 매력에 빠져서 마흔 중반부터 독학으로 공부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오십이 넘어가면서 직장생활을 그만하고 제 일을 찾고 싶었는데, 그때 이미 전통주의 의미가 저에겐 꽤 큰 무게감으로 다가와 있었죠. 전통주 문화를 알리는 일을 80세까지 해보자는 생각에 더 깊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최인태 촌장이 운영하는 사천 막걸리 문화촌 수료를 시작으로 박록담 한국전통주 연구소장에게 특별지도반을 수료하고, 주인(酒人) 2급 자격증을 취득해 창원 북면에 주가(酒家), ‘전통주 이야기’를 만들었다. 북면 온천단지의 한 골목길 끝에 자리한 이 공간은 ‘酒(주)’라고 적힌 작은 간판 하나 내걸고 도심과 등진 채 자리하고 있었다. 일반 주택처럼 보이는 건물 입구 앞엔 누룩을 빚는 넓은 대야 4개가 고소한 향을 풍기며 펼쳐져 있고, 술을 빚을 때 쓰는 베 여러 장이 빨래 건조대에 걸려서 흩날리고 있었다. 건물 내부는 술을 빚는 주방과 작업실, 사무실로 구분돼 있었다. 주방과 연결된 작업실 둘레로 큰 술독들이 즐비하게 놓여있고, 벽면에는 이곳을 다녀간 수백명의 방명록으로 도배돼 있었다. 작업실 내부에는 여러 전통주와 그가 만들어 낸 전통주까지 수십병의 술병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원래 여기가 꽤 오래 비워져 있던 식당이었어요. 당시 자금 사정에도 딱 맞았고, 건물이 도심을 등지고 있다는 것도 꽤 마음에 들더라고요.(하하) 처음에는 여기서 다양한 전통주도 팔고 마시면서, 수업도 하고 연구도 하려는 생각에 일반음식점으로 등록을 했는데, 판매하는 건 제 적성에 안 맞더라고요. 금방 관두고 수업을 하고, 좋은 분들과 술을 품평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장사를 하지 않으니깐 큰 돈이 되진 않지만 이렇게 외진 곳에 매일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 주시니 성공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허승호 ‘전통주 이야기’ 대표./김승권 기자/
허승호 ‘전통주 이야기’ 대표./김승권 기자/

대학 때 지리산 자주 찾아 ‘산적’으로 불려
술을 빚는 것은 창조·예술의 과정과 같아
창원만의 좋은 전통주 만드는 게 바람
예비 사회적기업 ‘전통주 이야기’ 설립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최고급 술 만들 것

◇지리산 산적, 몽산(夢山)이 되다

대학 시절 총학생회 간부로 소위 운동권에 앞장서던 그의 별명은 ‘산적’이었다. 사람과 술을 좋아하고, 정의 구현을 외치면서 틈만 나면 지리산을 오르내리던 20대 청춘은 졸업 이후 제관사, 용접, 배달, 보험사 영업 등을 전전하다 30대 후반부터 병원 행정직으로 평범한 가장의 삶을 성실히 살아냈다. 그러던 그가 전통주를 접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원래 술을 좋아하던 애주가였는데, 40대 중반에 우연히 우리 전통주 관련 책을 읽으면서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리고 우리 재료로 만든 진짜 전통주 맛을 보고 빠져들었죠. 집에서 혼자 술을 빚겠다고 일을 벌이다가 아내 눈총도 많이 받았고요.(웃음) 공부할수록 전통주는 더 매력적이더라고요. 그러다가 이 공간까지 만들면서 업으로 삼게 됐죠.”

그렇게 매일 술을 빚으면서 그는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술은 사람의 힘으로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술을 빚는 것은 창조의 과정이고 예술의 과정과 같습니다. 백지에 붓을 들고 감정대로 그리는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주 재료인 쌀과 누룩은 향이 없는데 곰팡이에 의한 발효가 활발히 일어날수록 꽃과 과일의 신맛과 단맛이 나는 술이 창조가 되거든요. 완전히 다른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이렇게 술을 만들어 보면 술이 얼마나 귀한지 느껴집니다. 그래서 술을 빚는 행위는 저에게 곧 그리움입니다.”

산적으로 불리던 그는 최근 새로운 별명을 가지게 됐다. 다천 김종원 선생이 붙여준 호 ‘몽산(夢山)’이다. 다천 선생은 그의 호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스스로 숲 아래 숨어/ 장자를 꿈꾸고 /꽃 속에 술을 대하고/ 이백을 기약하네/ 적막한 산 속에서 지난일/ 생각해보니/ 세상의 험함과 쉬움/누구에게 물으랴.’

허승호 '전통주 이야기' 대표가 창원시 의창구 북면의 전통주 이야기 숙성실에서 옹기에서 익어가고 있는 전통주 향을 맡고 있다./김승권 기자/
허승호 '전통주 이야기' 대표가 창원시 의창구 북면의 전통주 이야기 숙성실에서 옹기에서 익어가고 있는 전통주 향을 맡고 있다./김승권 기자/

◇지역 전통주의 부활을 꿈꾸다

허 대표는 2022년부터 2년째 창원전통주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전통주라는 이름에 걸맞게 청주와 탁주 부문으로 이뤄지며, 탁주는 효모와 효소제, 인공첨가물, 감미료 등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오롯이 사비를 털어서 진행하는 대회다. 수업을 들은 수강생은 물론 지역의 다양한 전통주 연구가들이 모여서 전통주를 즐기고 최고의 맛을 찾는다. 그는 이 대회를 발판으로 창원 전통주의 부활을 꿈꾼다고 했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창원에 살고 있는 각종 곰팡이가 누룩에 붙어서 창조된 술들이 한 자리에서 경합을 벌이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활동의 원동력을 우리 술 문화를 되찾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제가 양곡을 수탈하고 일본식 주류를 보급하기 위해 총독부가 강제한 주세령으로 가양주를 불법으로 만들면서 다양한 전통주가 사라졌죠. 게다가 우리 술은 정당한 이름도 빼앗겼습니다. 더 이상 특유의 누룩을 사용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허가한 단일균을 사용해 술을 만들게 되면서 모든 술 빚는 과정이 단순화되고 쓴맛이 나게 된 겁니다.” 그렇게 해방 이후에도 100년 넘게 주세법이 개정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허승호 ‘전통주 이야기’ 대표./김승권 기자/
허승호 ‘전통주 이야기’ 대표./김승권 기자/
허승호 ‘전통주 이야기’ 대표./김승권 기자/
허승호 ‘전통주 이야기’ 대표./김승권 기자/

그는 그렇게 사라진 전통주를 창원에서부터 부활시키고 싶다.

“지금까지 안동 송화주와 전주 이강주 등 전국 각 지역마다 전해내려오는 전통주가 있지만 경남은 진짜 열악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창원만의 좋은 전통주를 만드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

그는 특히 창원의 큰 축제인 진해 벚꽃 군항제와 마산 국화축제에 대표 지역 전통주가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지난 2019년 사비로 국화주를 만들어 국화축제에서 무료 시음회를 진행하기도 했지만, 행사를 진행하는 인건비와 술을 빚는 비용 등의 부담으로 시음회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전통주 확산 운동의 일환으로 최근 사회적 법인을 설립했다. 지난해 8월 등록한 예비 사회적기업 ‘전통주 이야기’다..

“그동안 제 술을 지인들과 나누기만 했는데, 이제 제 이름으로 상품화된 술을 만들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술을 가르치면서 제 이름으로 된 술을 시장에서 평가를 받지 않는 다는 게 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큰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대량생산을 하진 않을 생각입니다. 이번 기회에 진짜 최고급 재료를 사용해서 좋은 술을 만들어서 더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술로 만들어 전통주 문화에 기여하고 싶은 게 제 바람입니다. 또 사회적 기업으로 번 돈을 교육에 투자해서 지역에 좋은 전통주를 빚고 즐기는 사람이 더 늘어나는 게 제 목표입니다.”

조고운 기자 luc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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