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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김민창 진주향토시민학교 선생님

“배움의 갈증, 꿈과 희망으로 풀어드립니다”

기사입력 : 2023-10-04 21:22:20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교육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것이 진주향토시민학교가 존속하는 이유이지요.”

진주시 성북동 원도심 주택가 입구 허름한 건물 3층에 자리한 진주향토시민학교. 이곳의 선생님 김민창(54)씨가 28년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온 일자리며 생활 터전이다.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그는 진주향토시민학교가 생겨나게 된 이유가 함축돼 있는 설립취지문을 소개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많은 교육기관들이 있지만 개인적·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교육 기회를 잃은 사람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습니다….’

배우지 못한 근로 청소년들을 가르치기 위해 야학으로 출발한 향토시민학교는 세월이 흐르면서 변해가는 세상과 같이 교육 형태도, 교육 대상도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분명한 것은 배움에 목마른 서민들을 위한 교육의 한 축으로,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야학은 이제 근로청소년들이 아닌 학교 밖 학생들과 만학도들이 중심이 됐고, 주간과 야간을 모두 운영하고 있다.

진주시 성북동 주택가의 건물 3층에 자리한 진주향토시민학교에서 김민창 선생님이 수업을 하고 있다.
진주시 성북동 주택가의 건물 3층에 자리한 진주향토시민학교에서 김민창 선생님이 수업을 하고 있다.


대학 입학 직후 선배 권유로 야학과 인연
1995년 진주향토시민학교 교사로 봉사 시작
주·야간, 중·고교, 영어반 하루 13시간 강의
교장·교사·행정·대외업무 등 ‘1인 4역’ 담당
생활은 전적으로 30여명 후원자들에게 의지


◇대학 재학 중 야학과 인연 맺어= “실로 우연한 계기로 야학에서 가르침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평생의 외길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처지에서도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대학 입학 직후 선배로부터 야학을 소개받았고, 이때(1986년) 설립된 진주야학은 장소가 없어 전전하다 1988년 3월 개교했다.

그가 야학을 찾은 것은 학생 모집에 협조해 달라는 선배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당시 이곳에서 설립취지문을 읽고 감동했고, 근로청소년과 만학도들을 만나면서 야학과의 인연이 시작됐다고 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하는 봉사에 가슴이 벅찼던 것은 배우지 못했고, 가난한 농부이면서도 자식 공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자신의 부모님 생각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잠시 공백을 뒀다가 그가 본격적으로 야학에 뛰어든 것은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해 2년 남은 대학을 졸업한 후부터다. 취업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진주향토학교가 폐교 위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막기 위해 학생 모집에 힘을 보태고 자원봉사 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

그가 본격적으로 야학을 시작한 1995년 상황은 1988년 상황과 많이 달랐다. 야간수업이 없어지고 근로청소년도 사라진 학교는 만학도 위주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17명의 제자들을 모시고 수업을 진행하게 됐다는 김 선생님은 1996년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건물을 비워달라는 요구에 이전할 형편이 안 됐던 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한 것이다.

“여러 날을 고민하다 언론을 통해 폐교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습니다, 지역언론이 학교 사정을 보도하면서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나와 지금의 장소로 무사히 이전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계속되는 고된 시간들이었지만 멀리 서부경남 시골지역에서 배우기 위해 달려오시는 많은 분들을 보면서 포기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야학을 이어오고 있다.


만학도·학교 밖 학생 등 1300여명 거쳐가
검정고시 합격 879명 배출, 146명 대학 졸업
학교 형편 어렵지만 2030년까지 운영 목표
“4시간 계속 강의해도 듣는 모습 보면 힘 솟아
눈물을 닦아주는 스승의 길 걸어가겠다”


◇교재 만들어 하루 13시간씩 강의= “학습능력은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면 이해가 어렵습니다. 되도록 쉽게 강의하는 것이 그동안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만학도들이나 영어에 관심이 있는 분들도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진주향토시민학교에 오는 학생들은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다. 다양한 연령층을 교육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만학도들은 의욕은 넘치나 기억력이 약해 이를 위한 별도의 교재가 필요하다. 김씨는 별도의 교재도 만들었다고 한다.

최근 향토시민학교는 기초 영어와 한글 수업을 병행하면서 중·고교 검정고시반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영어 때문에 간판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1160단어를 추려 발음과 우리말 뜻을 알 수 있도록 교육하고 있다.

월수금, 화목토로 나눠 주·야간 중·고교반, 영어반 등을 운영하면서 하루 강의시간이 13시간에 달한다. 가히 철인이 아닐 수 없다. 현재 학생당 회비 10만원을 받고 있지만, 교재값에도 미치지 못한다. 자신의 생활은 전적으로 주위 30여명의 후원자들에게 의지하고 있다.

생활인으로서 제대로 된 가장의 역할을 해본 적이 없어 항상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한다.

“몸은 고되지만 연 40명 검정고시 합격자 배출, 5명 이상 대학입학자 배출 목표를 달성한 것은 나 자신의 성취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향토시민학교를 거쳐간 사람들이 1300여명, 이 중 검정고시 합격자만 879명을 배출했고, 146명의 대학 졸업자도 나왔다.

2011년에는 70세 여제자가 최고령으로 고교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같은 해 2회에도 70세 제자가 경남 최고령으로 고교 검정고시에 합격하는 등 많은 고령자들이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이들 중 다수가 대학교와 대학원에 진학했다. 77세에 대학원을 졸업한 제자도 있다.

진주시 성북동 주택가의 건물 3층에 자리한 진주향토시민학교에서 김민창 선생님이 수업을 하고 있다.
진주시 성북동 주택가의 건물 3층에 자리한 진주향토시민학교에서 김민창 선생님이 수업을 하고 있다.

◇교장·교사·행정·대외업무 1인 4역= 그는 교장선생님이자 강의를 전담하는 교사, 학교 행정, 대외업무까지 혼자서 1인 4역을 하고 있다.

“야학에 몸담은 세월이 살아온 인생의 절반이 넘는 29년을 향해 가고 있지만, 그동안 이 배움터에서 많은 분들을 만나고 이들이 배움을 기반으로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은 큰 위안이지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아 이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자원봉사 교사가 없어지고, 기존 봉사를 하던 교사들도 하나둘씩 떠나면서 진주향토시민학교에는 김씨 혼자 남게 됐다. 그는 지금도 다양한 연령층의 학생들이 계속 학교를 찾고 있어 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여긴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방송통신대를 비롯한 많은 교육방법과 기회가 있지만 그래도 야학은 꼭 있어야 하고,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꿈과 목표= “적어도 2030년까지는 진주향토시민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전국의 야학이 모두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 야학의 존재는 없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운영이 많이 힘들어 보인다. 최소 2030년까지 운영이 목표이지만 그 목표가 이뤄질지는 그도 장담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학교 운영도 힘든데 수년 전 그의 셋째 딸이 교통사고로 뇌병변 1급 판정을 받았다. 요즘은 학교 마치는 시간이면 딸을 데리고 치료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이제 겨우 큰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면서 자리를 잡고 있고, 둘째 딸은 마산대학교에 재학하면서 일본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다. 자식들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김씨는 “아직도 50~60대 문맹자를 비롯해 숨어 공부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은데, 진주향토시민학교가 폐교하면 이들의 배움의 갈증을 치유해주지 못한다”고 걱정한다.

“지금도 서부경남 주민들의 배움터인 진주향토학교를 지키기 위해 걸어갑니다. 많은 아픔을 간직하고 오시는 분들께 언제나 희망을 노래합니다. 기적과도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살다 보면 꿈을 잃게 되고 절망에 빠집니다. 이곳에 오시는 분들은 꿈을 꾸고 삽니다. 그래서 언제나 밝고 건강하게 수업을 듣고 계십니다. 4시간을 계속 강의해도 눈을 크게 뜨고 듣는 모습을 보면 새로운 힘이 솟아납니다. 빨리 어두운 터널을 나올 수 있도록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강의합니다.”

사람들은 힘들면 쉬었다가 다시 하지만 김씨는 쉴 수가 없다고 한다. 눈물을 닦아주는 스승이 되기 위해 28년 외길을 걸어왔고, 그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글·사진= 강진태 기자 kangjt@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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