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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작업실] (9) 감성빈 조각가·화가

슬픔을 예술로 껴안는다, 반지하의 따뜻한 위로 속에서

기사입력 : 2023-12-13 10:16:45

유학 중 형 부고에 고향 돌아와
가업인 목장 이어받고 미술 작업
예술가들 있던 반지하 작업실서
지역 예술계 소속감·안정 느껴
가족 잃은 상처·슬픔 모티브로
사회적 비극까지 껴안고 위로
“슬픔은 서로 마주할 때 치유돼
삶의 다양한 모습 계속 다룰 것”


슬펐다. 말라버린 눈물을 대신해 작품을 쏟아냈다. 감정을 토해낸 형상들은 어느새 사람들에게 위안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때 그가 생각한다. 가장 큰 위로는 마주본 슬픔, 그렇기에 서로가 부둥켜안게 되는 애상(哀傷)이 아닌가.

조각가이자 화가인 감성빈(39) 작가는 사람의 감정, 지금까지는 슬픔에 가장 특화된 예술가다. 가족을 잃은 상처를 가진 그에게 슬픔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창원에 위치한 그의 반지하 작업실은 힘든 시기를 함께하며 그가 토해낸 슬픔으로 가득 찬 곳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랬기에 가장 큰 위로를 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감성빈 작가가 창원시 의창구 사림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그림 작업을 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감성빈 작가가 창원시 의창구 사림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그림 작업을 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돌아온 창원, 지역 예술가를 향한 걸음

-미술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간 것으로 안다. 창원에는 언제 돌아왔는가?

△20대 중반에 미술이 하고 싶어져 고향인 창원을 떠나 미술 공부를 했었다. 그러다가 2012년 즈음에 다시 돌아왔다. 창원에서 가업을 이어받아 목장 일을 시작했다. 1년 동안은 너무 바빠 더 이상 미술을 하지 못하겠다 생각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목장을 하면서 미술을 했는데 작가로서 안정을 찾으면서 3년 전 목장일을 끝냈다.

-현재의 작업실은 그때 마련했나?

△처음에는 당장 작업실을 구할 수 없어 목장 인근 쓰지 않는 공간을 이용해서 작업을 했다. 지금 작업실을 구한 것은 2014년 즈음 된다. 당시 창원에서 작업을 하던 예술가 두 분이 함께 작업실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슬프고 외로운 감정이 크고 지역 예술가로서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양해를 구하고 이곳에 들어서게 됐다. 지금은 두 분 다 나가시고 나 혼자 쓰고 있다.

감성빈 작가가 창원시 의창구 사림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유채 물감을 살펴보고 있다./성승건 기자/
감성빈 작가가 창원시 의창구 사림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유채 물감을 살펴보고 있다./성승건 기자/
감성빈 작가의 작업실 한켠에 놓여 있는 유채 물감들./성승건 기자/
감성빈 작가의 작업실 한켠에 놓여 있는 유채 물감들./성승건 기자/

-작업실에 각별한 애정이 있는 것 같은데, 이유가 있는지.

△목장을 벗어난 작업실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지역 예술계에 소속감을 느끼게 해줬고 정서적인 안정을 주기도 했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내 감정을 오롯이 받아줬던 공간이기도 하고, 또 예술가로서 걸어가는 길을 함께 했던 동반자라서 그런 것 같다. 이 작업실에는 초창기 작품부터 지금 작업을 진행하는 작품까지 예술가로서의 내 발자취가 다 있다. 또 작업실에 대한 애정은 내가 예술가로서 커온 지역에 대한 애정으로도 연결되는 것 같다.

-쉴 수 있는 소파나 푹신한 의자가 보이지 않는다. 휴식공간이 따로 없는 건가?

△원래는 소파가 있었다. 그런데 편안함을 누리다 보니 작업하는 시간이 짧아지더라. 그 편안함을 없애고 작업할 때는 작업에만 몰입해보자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쉴 수 있는 것들을 배제하다 보니 지금은 꽤 삭막한 느낌인데, 오히려 내 감정에 더 집중이 잘되는 것 같다.

◇슬픔이 전하는 위로

-언제부터 슬픔과 위로가 주 모티브로 사용됐나.

△창원으로 온 이후로 그랬다. 사실 유학길에서 돌아온 것은 형이 세상을 떠나면서다. 내가 미술을 하는 것은 형의 역할이 컸다.

어릴 때부터 형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면서 커왔고, 형이 가업을 물려받았기에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형의 죽음은 가족에게 큰 충격이었다. 처음에는 나 스스로를 들여다보지 못해 타자의 슬픔에 기대는 형식으로 슬픔을 토해내고 있었다. 결국 내 감정, 슬픔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었고 위로를 받고 싶었다.

감성빈 作 '위로'.
감성빈 作 '위로'.
감성빈 作 '위로'.
감성빈 作 '위로'.

-‘사회의 슬픔’까지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 사회적인 비극으로 인한 슬픔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어차서 어쩌면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그 형상도 만들었다.

그런데 이 형상에서 사람들이 위안을 얻었다니까 그때 내 작업이 가볍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슬픔을 기록하고 그 안에서 위로를 하는 것을 숙명처럼 느끼게 됐다. 때문에 세월호 사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등 사회적인 슬픔을 다루기 시작했다. 최근 만들고 있는 작품 또한 여수·순천 10·19 사건을 담았다. 이 작품은 조만간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작업실에 서로 끌어안은 형상의 조각과 그림이 많다. 현재 ‘감성빈’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이미지인데, 만들어진 계기가 있는가.

△처음에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른의 모습으로 ‘포옹하는 형태’가 됐다. 체온과 체온이 만나면서 나누는 가장 큰 위안이라고 생각했기에, 그걸 계기로 서로를 끌어안는 이들을 작업했다. 그러다 점차 그들을 표현할 옷을 벗기고 색을 덜어내면서 나체의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게 만들어 슬픔과 위로 그 자체의 감정에 집중시켰다.

-슬픔이란 것은 긍정적인 감정은 아닌데, 어떻게 위로로 연결될 수 있었는가.

△동병상련인가. 슬픔에 빠진 사람은 똑같이 슬픔에 빠진 사람을 더 잘 알 수 있다. 더 공감하고 감정을 공유하며 그렇게 치유의 길로 나아간다. 슬픔 속에서 가장 큰 애틋함이 발휘된다고 생각한다. 슬플 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나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지 않은가. 위로에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그저 말없이 옆에 있어주고 끌어안아 주는 것. 내가 바라는 위로이기도 하다.

감성빈 作 '위로'.
감성빈 作 '위로'.

◇작품으로 끌어안을 또 다른 삶의 모습들

-작업실에 아내와 자녀의 사진들이 보인다. 가정에 대한 감정 또한 작업에 반영되나.

△사실 결혼하고 난 뒤에 작품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무채색이 주를 이뤘던 색감도 자연스럽게 밝아지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껴안는 이미지’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됐다. 그렇기에 그전까지는 슬픔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노래를 예로 들자면 기교 없는 외침이었다면 이제는 슬픔과 위로를 더 다양한 모습으로 세련된 기교를 사용하고자 하고 있다.

감성빈 작가가 창원시 의창구 사림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그림 작업을 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감성빈 작가가 창원시 의창구 사림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그림 작업을 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작업을 해나가고 싶은가.

△명확한 방향은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 묻어 있는, 삶의 부분들을 다루는 작업은 계속될 것 같다. 그것이 슬픔의 감정일지 아니면 다른 것일지는 알 수 없다.

최근에는 따뜻한 이미지를 염두에 뒀는데, 그것을 생각하다 보니 다양한 색을 만나고 회화작업을 하게 됐다. 평면 작업을 하면서도 입체 작업은 계속하고 싶어서 액자를 조각처럼 직접 만들기도 하고. 순간순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계속 발전해 나갈 것 같다.

어태희 기자 ttott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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