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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 정치판

[책] 우리는 절망에 익숙해서

기사입력 : 2024-03-27 08:09:31

밥그릇 지키기 급급한 기성 정치인의 욕망
시민권 잃은 사람처럼 방치된 우리 이야기 담아
여성혐오·저출생 등 사회문제 해결 위해선
익숙한 절망 앞에서도 정치에 손 놓지 않아야


개인적으로 무지(無知)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타입은 아니라서 고백하자면 언론을 업으로 선택하기 전까지 대통령이니 국회의원이니 하는 정치 이야기를 머리에 담아본 적 없었다. 더 솔직해지자면 그보다 더 훗날 대통령 탄핵을 외치며 거의 전 국민이라 해도 될 정도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던 2016년 전까지도 필자의 인생에서 정치란 완벽하게 괴리돼 있었다.


그러니 그보다 수년 전 이명박 씨가 대통령이던 시절 한 대학 선배의 시위를 마주하고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하게 살았던 거지?’ 깨달았다는 ‘우리는 절망에 익숙해서’의 저자 ‘희석’은 깨어있는 민주시민임에 틀림 없다. 글의 서두에서 저자를 추켜세우는 것은 그가 스스로를 설명하는 문장에서 “자의식이라곤 없던 나 역시 가정과 학교의 정치 무관심에 동조했고, 한나라당이 제일 착한 곳이라 여기며 그냥 시키는 대로 학교와 학원만 다녔다”며 “전형적인 한남 성장 서사라 봐도 무방하다”고 깎아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한남을 남성 혐오 표현이라 생각하는 독자님이 계신다면 죄송하지만 책을 덮어주시길 바란다. 앞으로 이 책에 등장할 모든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각주를 달아 우려하는 탓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시민권을 잃은 사람처럼 방치된 우리에 관한 이야기이자 대통령 선거나 총선, 지방선거 등이 내 뜻과 다르게 종결됐더라도 절망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손 놓지 않아야 한다는 다짐의 기록이다. 그러니까 책을 두고 빨강이니 파랑이니, 여혐이니 남혐이니 하는 싸움은 의미가 없다고 적어둔다.

“80년대에 비하면 요즘 대학생들의 정치의식이 부족하다고들 했다.” 저자는 반문한다. 대학생들의 정치의식이 부족한 게 아니라 대학생들이 정치의식을 되도록 갖지 않았으면 했던 공동의 바람이 마침내 이뤄진 것 아닌가 하고. 그는 “투쟁으로 이뤄낸 민주주의를 다음 세대가 잘 이어가도록 양보하고 이끌어주는 게 아니라 자기 지역구와 자기 밥그릇 지키기에만 바빴던 기성 정치인들의 욕망이 만든 결과 아니냐”며 “그들이 만든 시스템 안에서, 형님과 아우가 이끄는 세계에서 차세대들은 조용히 입 다무는 법을 배우고 익혔다”고 진단한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그렇다고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닌 나의 머릿속은 한마디로 ‘꽃밭’이었다. 심각한 사실은, 나 같은 남자애들이 도처에 널렸었다는 점이다. 우리의 의식을 깨우려고 시도하거나 이명박 당선의 의미 등을 말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그러면서 자신과 그들을 다양성이 무엇인지 모르고, 선택적 가부장제만 고집하는 ‘가장 혐오적이고 가장 도태된 세대’라고 규정한다. 그렇지만 저자와 같이 1990년에 태어난 여성 필자로서 이건 그 시대 남성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필자 역시 다양성에 무지했고 성인지 감수성이 자랑할 만한 수준은 아니기에.

희석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보수 정권의 단점에서 지금 한국 정치의 문제를 짚는다.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기존의 체계를 무너뜨렸고, 그렇게 무너지는 과정에서 방치되는 개인을 철저히 외면하고 이익만 추구했다. 그래서 2016년, 지금은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종결된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당시 정치의 언어에서 여성혐오라는 단어는 실종된 듯 조용했음을 꼬집는다.

작가는 여성혐오와 저출생 등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선 정치가 작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정치에 손을 놓지 않아야 한다. 저자가 진주에서 독립출판사 ‘발코니’를 운영하며 이러한 글들을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청년세대에겐 ‘외국 아니면 천국’이라는 선택지만 남을 것이기에.

“어렵고 어둡지만 잘 해내고 싶다. 책에 대한 답장을 오래도록 기다릴 것이다. 우리는 절망에 익숙하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저자 희석, 출판 발코니, 208쪽, 가격 1만3800원

김현미 기자 hm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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