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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이역] 순례자- 이선중

기사입력 : 2024-03-28 08:08:24

가시를 삼키면서 울컥 나선 유배의 길

외길도 미로가 되는 나를 놓은 시공간

돌부리 발끝 부딪는

아픔 따윈 사소하다


붙박이별 여전하니 길을 묻지 않으리

길가에 꽃 한 송이 겹도록 감사하나

신기루, 배신의 목마름은

익숙해도 뼈저리다


이슬 젖은 어둠 저편 산짐승 울음소리

아무도 모르는 노랫말로 위로 삼으며

한숨이 시가 되는 날까지

홀로 가는 바람처럼


산티아고로 가는 길 위에서 생에 대한 단순한 진리를 배웠다고 이야기하는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가 떠오른다. 종교적인 목적으로 순례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평범한 일상에서 시의 뿌리를 찾아 먼 곳을 방랑하는 순례자가 여기 있다.

먼 길에 ‘돌부리 발끝 부딪는 아픔 따윈 사소하다’고 가시를 삼키면서 죄인처럼 격리수용되는 성찰의 시간은 그만둘 수 없는 시인의 길이다. 순탄하고 익숙한 길에 문득 낯설어져 미로처럼 헤매기도 하거니와 믿을 것이 못 되는 신기루 같은 시공간을 찾아가는 것이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 길에서 만나는 풀 한 포기, 들꽃 한 송이조차 경이로운 체험과 존경의 마음이 드는 것이 시인의 삶이다.

‘이슬 젖은 어둠 저편 산짐승 울음소리’ 들으며 ‘아무도 모르는 노랫말을 위로 삼으며’ 먼 길 가야 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틈틈이 성지를 찾아다니며 참배하는 순례자처럼, 푸른 밤하늘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만날 수 있는 시혼과, 슬픔과 고통에 기인한 시인의 존재감으로, 고뇌와 탄식은 아름답고 행복한 엄살이다.

한숨이 시가 되는 날까지 즐거이 이 길을 걸어갈 시인이여, 길 위에 선 시인이여.

- 옥영숙(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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