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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예술인을 담다] (18) ‘도내 유일’ 이승기 고전영화해설사

“80여년 삶 위로하고 예찬… 영화는 내 인생”

기사입력 : 2024-04-29 08:03:51

7살때 통영 ‘봉래극장’서 日 영화 처음 접해
마산 온 후 영화감독 꿈꾸며 꾸준히 극장 찾아

성인되고 1년에 영화 100~200편씩 감상
라디오·대학 등서 영화 평론가·연구가 활동


마산 창동에 위치한 마산문화예술센터 시민극장. 영화가 시작하기 이전 설렘 가득한 순간 정장을 입은 노년의 신사가 스크린 앞으로 걸어 들어온다. 팔순을 넘긴 나이임에도 영화를 얘기할때 소년처럼 눈이 반짝이는, 이승기(85)씨는 경남의 유일한 고전영화해설사다.

이승기 고전 영화해설사가 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산문화예술센터 시민극장 내 영화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이승기 고전 영화해설사가 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산문화예술센터 시민극장 내 영화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영화로 이어지는 삶= 2021년 재탄생한 마산시민극장에서는 지난해부터 고전영화를 포함한 영화 무료상영을 진행하고 있다. 이 해설가도 영화 상영에 합류해 상영할 영화의 리스트를 기획하고 영화 상영 전 관객들에게 영화를 해설한다. 기본적인 영화의 제작 연도와 장르의 설명, 상영 시간과 더불어 배우에 얽힌 이야기나 영화 속의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5~10분의 해설을 덧붙이고 나면 영화가 시작된다. 해설이 끝난 그도 옹기종기 앉아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들 너머로 스크린을 바라본다. 수십번을 본 영화이지만 매번 예전의 추억이 떠오른다. 극장에서 학교 선생님과 마주쳤지만 고집을 부려 영화를 다 보고 결국 정학을 먹었던 학창시절, 겨우 입장료만 있어 콜라 없이 빵만 먹으면서 가슴 치고 영화를 보던 수많은 날들. 그의 삶은 언제나 영화로 이어진다.

영화를 처음 봤던 날도 기억 난다. 1944년 이 해설가가 7살인 시절, 통영 ‘봉래극장’에서다. 당시 일제 치하에 있어 일본에서 들어온 태평양 전쟁 선전뉴스와 사무라이 영화가 상영됐다. 해방 이후에는 우리나라 영화가 만들어졌고, 1953년 마산으로 넘어온 이후 영화를 좋아했던 그의 꿈은 영화감독이 됐다.

감독을 하려면 영화를 많이 봐야 한다는 생각에 교사들의 눈을 피해 꾸준히 극장가로 갔다. 당시 제일 좋아했던 영화는 머빈 르로이 감독이 1949년에 발표한 ‘푸른화원(원제: 작은 아씨들)’이다. 극중 ‘조’를 연기한 준 알리슨의 팬이 되어 팬레터를 보내기도 했다. 이 선생은 아직도 마음이 울적할 때는 ‘푸른화원’ DVD를 틀어본다.

이승기 해설사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푸른화원 포스터.
이승기 해설사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푸른화원 포스터.

성인이 된 이후로는 1년에 영화 100여편을 보러 다녔다. 특히 입장료 하나로 영화를 두 번 볼 수 있는 동시상영관이 생겨났을 때는 200편을 넘게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꾸준히 영화와 관련한 포스터, 브로마이드, 비디오 등을 수집해갔다. 그가 업으로 삼았던 것도 영화와 관련된 일들이다. 라디오와 대학 등에서 영화해설과 강의를 하면서 영화 평론가이자 연구가로 활동했다. 독립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 제 손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이후 수집했던 영화 자료들을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으로 옮겨 이 선생은 영화자료관장이 되기도 했다.

2009년 마산 100년 영화사 정리한 책 집필
현재 시민극장서 영화 리스트 기획하고 해설

“지역 유일 단관영화관 ‘씨네아트 리좀’ 관심을
건강 허락하는 한 영화 이야기 계속하고파”

◇스크린이 비추는 인생 찬가= 마산시민극장에 영화를 보러오는 이들은 60~80대가 많다. 이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소녀 같은 할머니 팬들’이 자주 온다. 이 선생과 그들은 비슷한 경험들을 공유하고 있다.

“그 시절 영화를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그 추억을 느끼는 게 좋다고 하더군요. 여고시절에 영화가 보고 싶어서 교사 몰래 들어가고, 그걸 들켜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죠. 그때는 아슬아슬했지만 지금은 즐거운 추억이니까요.”

이들 앞에서 영화해설을 하는 일은 무엇보다 즐겁다. 수십번을 본 고전영화들에 대한 정보는 그의 기억에 단단히 자리 잡아 있지만, 관객들에게 더 유익하고 재밌는 해설이 되기 위해 그 나름의 노력을 한다. 추억으로 향하는 영화 상영이기도 하지만, 영화를 감상하면서 다시금 영화의 가치에 대해 깨닫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그 나름의 철학이 있어서다. 그리고 그 가치가 마산 위에서 움트길 바란다. 그는 2009년 마산의 100년 영화사를 정리한 ‘마산영화 100년’을 집필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10개가 넘었던 지역의 극장이 하나둘 문을 닫고 대형 영화관이 남아 상업 영화만을 상영하는 것이 그에게는 아쉽게 다가온다.

“지금은 마산에 ‘씨네아트 리좀’이라는 지역 유일 단관영화관이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상영해주는데, 사람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독립영화는 상업영화가 비추지 않는 또 다른 가치들을 조명해주니까요.”

그렇기에 이 선생에게 남은 숙제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늘어나게 돕는 일이다. 80년을 넘는 시간 그는 영화로 웃고, 울고, 사랑하며 삶을 배워왔다.

“유명 평론가가 ‘영화란 인생 찬가’라고 했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 삶에 온통 영화만이 있었기에 내가 영화를 가장 잘 알듯이, 영화도 나를 가장 잘 알기에 내 삶을 위로하고 예찬했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앞으로도 영화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한편, 마산시민극장은 매년 1월부터 8월까지 영화 상영을 진행하고 있다. 입장료는 무료로 문의는 마산예총에 전화(☏ 055-296-2266)로 하면 된다.

어태희 기자 ttott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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