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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사람을 만난다는 것의 의미- 채도운(작가·보틀북스 대표)

기사입력 : 2024-05-09 21:41:56

얼마 전 한 어르신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내가 25년간 연구한 자료들을 기증하고 싶소.” 여든이 넘은 듯 연륜이 느껴지는 어르신의 목소리를 듣고 처음 떠올린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르신이 전화를 주신 곳은 어느 대학의 연구소도 아니고, 출판사도 아니고, 문산읍에 자리하고 있는 자그마한 동네 서점 겸 카페일 뿐이었다. 어르신은 거동이 불편하니 자신을 찾아와달라고 말씀하신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한 주를 흘려보냈다.

세상에 사연 없는 이 없다는 말처럼, 나는 어르신과 같은 연락을 많이 받곤 했다. 한 번은 교도소의 수감인으로부터 교도소에서는 읽을 책이 없으니 택배로 보내달라는 편지를 받기도 했고, 다른 한 번은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사 읽으니 자신에게 투자하는 셈 치고 책을 기증해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느낀 점은, 내가 모든 사람의 진위를 파악할 수 없으므로 선뜻 손을 내밀기가 저어된다는 것과 내가 가진 것은 늘 제한적이라서 무작정 베풀기도 어렵다는 점이었다.

나는 처음 이 공간을 차렸을 당시의 마음을 떠올려보곤 했다. 오후 7시만 되면 온통 깜깜한 이 동네에서 여자 혼자 자영업을 한다니 무섭지도 않냐면서 치안을 걱정하는 지인들을 두고서는 “우리네 세상은 아직 그렇게까지 각박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CCTV라도 설치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 앞에서는 “다른 것도 아니고 책을 훔쳐 갈 정도면 얼마나 읽고 싶었겠어”라고 말했다. 고백하건대 처음의 마음은 많이 움츠러들었다. 훔쳐 간 한 권의 책이 하루의 매출이 되고, 타인을 위해 베푼 시간은 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과 같은 어르신의 연락은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다. 세상의 주류가 되지 못하고 비주류가 된 사람들, 알아주는 이 없이 묻혀가는 사람들의 사연이 나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인다. 가슴에 새겨두고 있는 박주영 판사님의 말씀도 떠오른다. “비록 하찮아 보일지라도 생의 기로에 선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대책은 그저 눈길을 주고 귀 기울여 그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주말에 어르신을 찾아뵈었다. 어르신은 집 한편에 작업실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25년간 향교에서 배운 내용을 하나하나 제본해 책으로 만들어두었는데 양이 어마어마했다. 진주 촉석루에 있는 현판에 있는 시구를 해석한 자료도 눈길이 갔다. “다 주려면 아깝지 않으세요?”라고 묻는 내게 어르신이 말했다. “솔직히 잠을 하나도 못 잤소. 딸을 시집보낼 때보다 더 아깝더라고. 그런데 지금이 내려놓아야 하는 시기인 것 같아서…. 아내는 병원에 갔는데 아마 죽어서야 그 병원에서 나올 수 있겠지. 나도 따라갈 준비를 해야지.” 어르신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눈물이 고여 투명하게 비치는 눈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눈을 보며 나는 각오를 다졌다. 앞으로도 이곳 진주에서 많은 이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리고 그들의 삶을 통해 세상을 만나고 배우고 싶다고 말이다.

책방지기가 만난 사람, 홍인 박인수 선생님

채도운(작가·보틀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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