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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균의 경남 영화 찰영 돋보기] (5) ‘은행나무침대’ 거제 여차 몽돌해변

은밀한 비경으로 출렁이던 곳, 천년의 사랑으로 술렁이다

기사입력 : 2024-06-13 21:16:38

강제규 감독 데뷔작… 1996년 개봉 판타지 영화 ‘은행나무침대’
황장군이 말 타고 궁중 악사 베던 장면 여차 몽돌해변서 촬영

‘여차~홍포해안길’ 3.5㎞ 구간 점점이 떠 있는 남해안 섬 절경
인근 구조라해수욕장·학동몽돌해변·바람의 언덕도 가 볼만


우리나라의 길 가운데서 필자가 가장 사랑하는 길 하나를 꼽으라면 거제 ‘여차~홍포해안길’이라고 말하고 싶다. 약 3.5㎞ 구간의 이 비포장도로는 점점이 떠 있는 남해의 섬을 조망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바다에 발목뼈를 드러낸 섬들은 대병대도, 소병대도, 대매물도, 소매물도, 어유도, 가왕도, 가익도, 국도 등이 손에 잡힐 듯 호젓하다. 오늘 만약, 남해안 절경을 보고 싶다면 무조건 떠나도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은 전망대도 설치되어 있어 많이 알려졌지만, 20년 전 내가 즐겨 찾던 때엔 그 은밀한 비경이 마음 한 곳을 출렁이게 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간 5월 중순, 숲이 너무 우거져 탁 트인 바다를 보기가 쉽지 않다. 일몰에 맞춰갔으나 해는 더 남쪽으로 져 그 장관을 보진 못했다.

이 길 따라 조금 더 가면 여차마을이 나온다. 강제규 감독의 영화 ‘은행나무침대’에서 황장군이 말을 달려와 궁중 악사인 종문을 베던 장면을 찍은 곳이다. 여차 몽돌해변은 그리 넓진 않다. 하지만 학동 몽돌보다는 작은 깻돌이 물살에 씻겨 빛난다. 이와 더불어 구조라해수욕장, 학동몽돌해변, 바람의 언덕, 해금강 등을 돌아보고 싱싱한 회와 멍게 해삼 한 접시라도 드시고 오기를 권해본다.

영화 ‘은행나무침대’ 촬영지인 거제 여차 몽돌해변./이달균 시인/
영화 ‘은행나무침대’ 촬영지인 거제 여차 몽돌해변./이달균 시인/
여차 몽돌해변에서 황장군(왼쪽)이 궁중악사인 종문을 베고 앉아 있는 장면.
여차 몽돌해변에서 황장군(왼쪽)이 궁중악사인 종문을 베고 앉아 있는 장면.

◇이룰 수 없었던 천년의 사랑

미련하게도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한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 대척점에 선 두 남녀의 사랑도 이뤄지지 못했다. 저승에서도 이승에서도, 천년 전에도 현생에서도 인연은 이어지지 못했다. 두 그루 은행나무가 되어 마주 보고 섰으나 결국 이룰 수 없었고, 세월을 건너뛰어 나무는 침대가 되었다. 혼자만의 사랑도 사랑이다. 그녀의 혼이 실린 은행나무 침대라면 그 불타는 침대와 함께 재가 되어 영원히 살거나 죽으리라.

우리나라 판타지 영화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이 영화가 개봉된 1996년만 해도 과거와 현대, 전생과 현생을 넘나드는 영화에 익숙지 않았다. 그 이전은 고사하고 이후에도 그다지 흔치는 않다. 이정재와 전지현 주연의 영화 ‘시월애’가 2000년에 개봉되었고, 2017년에 공유와 김고은 주연의 드라마 ‘도깨비’가 인기를 끈 정도다. 물론 2007년에 개봉한 심형래 감독의 ‘디-워’는 논란 끝에 초라한 결말을 맞고 말았다. 위 사례를 보더라도 한국에서 이런 식의 판타지는 성공을 보장받기 힘들다. 그렇다 보니 제작사를 만나기 쉽지 않았고, 흥행 또한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강제규 감독의 데뷔작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신인 감독에게 선뜻 손을 내밀어 줄 제작사 찾기는 난망했으며 흥행을 보장해 줄 만한 배우를 찾기란 더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끈질긴 노력 끝에 ‘신씨네’가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고, 황장군 역에 신현준이 캐스팅된다. 이로써 후에 ‘태극기 휘날리며’로 1000만 흥행 감독 반열에 오르는 한 재능 있는 감독은 꿈 같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영화 ‘은행나무침대’ 스틸컷.
영화 ‘은행나무침대’ 스틸컷.

◇이뤄지지 못한 사랑은 죽어 은행나무가 되었다

이제 영화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 보자. 수현(한석규)과 선영(심혜진) 딸의 내레이션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등장인물 소개를 하면서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진 두 은행나무 사이에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온다. 은행나무는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이며 독수리는 그들 사이에서 사랑을 채어 가려는 거친 남자를 은유한다. 그러다가 한 나무는 번개에 맞아 쓰러진다. 전편에 이어지는 대사는 마음이 오글거릴 만치 문학적이다. (실제 강제규 감독은 마산고 재학 시절, ‘돝섬문학동인’으로 참여하여 문학의 꿈을 키운 소년이기도 했기에 남다른 감수성을 갖고 있었다고 보인다.)

영화 전편에 이동준 음악감독이 연출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당시 이례적이게도 국악과 양악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OST는 큰 인기를 끌었다. (앨범 20만장 판매라는 초히트를 기록하였고, 현재는 구하기 힘든 물건이 되었다.) 워낙 오래된 영화라 몇 번이고 돌려보면서 감정이입을 시도했으나 그리 쉽지는 않다. 판타지일수록 논리적이어야 하고 구체성을 띠어야 한다. ‘반지의 제왕’, ‘아바타’, ‘혹성탈출’ 같은 작품들은 판타지 세계로 안내하지만, 단박에 관객을 몰입시킨다. 촬영기법도 그렇지만 사시적 시각을 갖는 사람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2024년 현재, 이 영화를 통해 손에 땀을 쥐는 서스펜스나 진한 사랑의 여운을 기대하는 것은 약간 무리인 듯하다. 시공간을 오가는 세련된 구성과 첨단의 컴퓨터그래픽에 익숙한 관객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과가 아니겠는가.

악역은 대부분 얼마간 스토리가 진행된 후에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처음부터 빌런의 존재를 먼저 드러낸다. 거대한 빌딩 옥상 전광판을 뒤로하고 선 채로 당당히 굽어보며 등장하는 황장군(신현준). 그리고 수현(한석규)과 선영(심혜진)의 평범한 일상이 그려진다. 수현의 애인인 선영은 종합병원 의사다. 어느 날 수현의 꿈에 긴 머리를 늘어뜨린 한 여인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꿈을 꾼다. 환영이었을까. 꿈이라기엔 예사롭지 않은 눈빛의 여인이다. 그리고 어떤 예감에 이끌리듯 시장을 헤매다 누가 버려놓은 침대를 가져온다. 묵중한 침대엔 남녀 두 사람 형상이 새겨져 있다. 이때부터 알지 못할 이상한 일들이 연속된다.

이야기는 다시 천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수현이 꿈에서 본 그녀의 신분은 공주였고, 이름은 미단(진희경)이다. 그렇다면 수현과 미단, 황장군은 과거 어떤 인연으로 얽힌 사이였을까. 당시 수현은 종문이란 이름을 가진 궁중 악사였고, 황장군은 당대 최고의 무관으로서 미단공주와는 결혼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미단공주는 악사 종문과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였다. 결국, 미단과 종문 역시 황장군의 방해로 인해 죽음에 이르고 둘은 은행나무로 화하고 만다.

황장군이 최고의 무사였다면 종문은 어떤 악사였을까. 수현이 만난 늙은 목수는 이렇게 전한다.

“그는 물처럼 부드럽고 때론 칼날처럼 강렬했지. 바람소리 벌레소리 심지어 자신의 숨소리마저 놓치지 않으려 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천상의 소리, 하늘의 소리를 가진 악사였지.”

앞에서 지나칠 정도로 문학적 디테일이 드러난다고 느껴지는 대사다. 미단이 종문을 사랑한 것이 이런 악사의 재능도 한몫했으리라 생각된다.

천년이 흘러 악사 종문은 다시 환생하여 화가 수현이 되었고, 미단은 은행나무 침대의 혼이 되었다. 질투에 찬 황장군이 이승에 와 사랑의 적대자인 수현을 처단하려 하자 그를 구하기 위해 미단이 나타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황장군의 공격을 피해 미단과 수현이 하이트 맥주 탑차 위에 떨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마산회원구 구암동에 하이트 맥주 공장이 있어 낯설지 않은데, 혹시 이곳이 고향인 감독이 애향심의 발로로 이런 장면을 슬쩍 넣은 것은 아닐까?

여차 앞바다.
여차 앞바다.
여차~홍포해안길에서 바라본 섬들.
여차~홍포해안길에서 바라본 섬들.

◇썰물은 밀려오고, 파도는 포말로 부서진다

이룰 수 없었던 집요한 사랑은 천년이 흐른 오늘까지 계속된다. 미단의 영혼은 현세(1996년)에 나타나 수현을 만나지만 안타깝게도 산자는 죽은 자의 혼령을 보지 못한다. 미단의 혼은 선영이 치료한 남자의 육체에 실려 있고, 그녀가 빠져나오자 환자는 혼수상태에 빠지고 죽게 되는데, 그로 인해 선영은 의료사고를 낸 돌팔이 의사로 낙인찍히고 만다.

몇 군데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 미단과 종문이 원색의 펄럭이는 빨래 사이에서 뜨겁게 입 맞추는 장면이 그렇다. 아름다운 사랑을 그렇게라도 인상 깊게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리라. 과거로 돌아간 화면엔 붉은 옷을 입은 악사들이 나란히 앉아 가야금을 켜고 있다. 궁중 악사들인 모양이다. 감독자는 한 낯익은 한 악사를 지나며 죽비로 어깨를 친다. 지쳐 있었는가, 아니면 어떤 일로 인해 감정이 흩어져 있었는가. 분명치는 않지만, 여느 때와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는 섬세하고 고도의 집중력을 가진 연주자인데, 그날은 달랐다. 아마도 미단과의 사이에 황장군이 개입하여 힘들어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한 장면, 황장군이 눈을 맞으며 꿇어앉아 문 닫은 미단의 방 앞에서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리는 모습, 절절하다. 그러나 눈을 뒤집어쓴 채 하얀 눈사람이 되어가지만, 한 번 닫힌 마음은 열리지 않는다. 분노에 찬 황장군은 종문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다. 그렇게 쫓긴 종문은 어느 바닷가로 온다. 그 집요한 질투는 오랜 역사의 흐름에도 지워지지 않고 환생을 사는 이승, 현대에까지 이어진다. 몽돌해변에서 두 사람이 극적인 상봉을 하기 직전 황장군은 말을 달려와 종문의 목을 베고 만다. 그 한 장면을 위해 말은 몇 번이나 몽돌밭을 누볐을까. 붉은 비단과 가야금은 하염없이 물살에 쓸린다.

그 바다가 바로 여차 몽돌밭이다. 썰물은 소리치며 밀려오고, 파도는 포말로 부서진다. 종문의 최후를 그리면서 음악은 관객의 귀를 휘감는다. 뉫살은 끝없이 반짝이고, 그 물살에 떠다니는 고무신 한 짝. 그 미완의 사랑은 은행나무가 되어 함께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례적이게도 악역인 황장군이 여성 관객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여세를 몰아 장기상영으로 이어졌고, 80만 관객을 모아 당시로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해 11월 홍콩에서도 개봉되었고, 이후 중국과 일본, 프랑스에서도 개봉되어 K-영화의 저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000년 1월에 속편인 ‘은행나무침대 2: 단적비연수’가 개봉되어 관객을 만났다.

제34회 대종상 여우주연상(심혜진)과 신인감독상(강제규), 제32회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을 비롯하여 제32회 백상예술대상, 제1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제2회 씨네21 영화상 등에서 여러 상을 수상하였다.

이달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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