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그림과 시를 자유롭게… 삶의 해학 화폭에 담은 ‘파스텔 화가’

[한국미술을 빛낸 경남의 거장들] (12) 강신석

기사입력 : 2024-06-17 21:18:57

제2의 고향 마산 정취 작품에 녹여낸 1세대 서양화가
일평생 강렬한 색과 질감·과감한 터치로 독자적 화풍
‘여명의 마산항’ ‘가오리’ ‘파이프가 있는 정물’ 등 대표작
시인 김춘수와 시화전… 자신의 그림에 시도 남겨


1980년 창원이 시로 승격되기 전까지 창원 지역 예술은 100여 년 전 개항한 마산시와 동일 생활권에 놓여 있어 모두 ‘마산 예술’로 설명되었다. 1899년 마산포 개항을 계기로 신문물이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마산은 경남의 중심 도시로 발전했다. 또한 해방 이후 새로운 문화를 습득한 출향인들의 귀국과 한국전쟁 이후 전국 각지에서 피란 온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활동하면서 ‘예향(藝鄕)’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암울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역설적으로 마산의 문화예술은 개화를 맞이한 것이다.

강신석, 여명의 마산항, 1974, 종이에 파스텔./개인 소장/
강신석, 여명의 마산항, 1974, 종이에 파스텔./개인 소장/

강신석(姜信碩, 1916~1994)은 바로 이 시기에 마산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1세대 서양화가이다. 파스텔 특유의 농밀한 발색과 질감을 통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했던 그는 ‘파스텔 화가’로 불렸다. 언뜻 보아도 그의 작품에서 주제, 이미지, 재료 및 기법 등 다양한 면에서 여러 흥미로운 지점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확인되는 작품 수가 워낙 적고, 유족 및 관계자와 연락이 닿지 않아 그의 작품들을 종합적으로 연구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이 지면의 기회를 빌려 현재까지 확보한 신문 기사와 마산 미술 연보, 그리고 각종 전시회 관련 자료들을 바탕으로 미약하게나마 그의 행적과 함께 작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충북 괴산 출신인 강신석은 일본 동경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하얼빈공업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50년대 초반 김환기, 문신, 남관, 양달석, 이준, 임호 등 작가들과 함께 해군 종군화가단에 소속되어 부산과 마산에서 활동했다. 이후 마산에 정착하여 꾸준히 창작활동을 이어갔는데, 그가 36세가 되던 1952년 마산 신한다방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여 많은 호평을 받았고, 이듬해부터 마산 시내 여러 다방에서 전시회를 열고 다수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마산고등학교와 부산 동아대학교 미술학과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물고기, 1973, 종이에 파스텔과 수채, 21×27.5㎝.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물고기, 1973, 종이에 파스텔과 수채, 21×27.5㎝.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정물(생선), 1970, 종이에 파스텔, 24.2×33.3㎝./개인 소장/
정물(생선), 1970, 종이에 파스텔, 24.2×33.3㎝./개인 소장/

호방하고 탐구적인 예술가로 경남의 원로 미술인들에게 회자되는 강신석의 성격은 그가 남긴 작품들에도 배어 나오는 듯하다. 작가는 일평생 파스텔에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파스텔(pastel)은 이름이 반죽(paste)에서 나온 것에서 알 수 있듯, 가루 안료를 수용성 응집물과 섞어 반죽해 만들어졌다. 덕분에 밀도 높은 부피감과 입체적인 두께감, 부드러운 질감이 가능하고 유화와 달리 여러 번 덧그려도 본래의 색을 잃지 않는다. ‘여명의 마산항’과 ‘파이프가 있는 정물’을 보면 그가 이런 파스텔의 장점을 십분 활용해 강렬한 색과 질감을 살려 배경을 처리하거나 거친 윤곽선을 과감하게 표현하는 등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해 나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작품들의 소재는 특별할 것 없이 일상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대상들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연밥, 1977, 종이에 파스텔, 24×33㎝./개인 소장/
연밥, 1977, 종이에 파스텔, 24×33㎝./개인 소장/
파이프와 찻사발, 1975, 종이에 파스텔, 19.8×24㎝. /개인 소장/
파이프와 찻사발, 1975, 종이에 파스텔, 19.8×24㎝. /개인 소장/

전쟁이 끝난 마산은 마술, 연극, 음악,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메카였고, 이러한 환경이 작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오리’는 마산 어시장의 마른 가오리가 배를 드러낸 모습을 그리고 하단에 다음과 같은 짧은 시를 남기며, 풀리지 않는 자신의 처지를 가오리에 빗대어 소탈하고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그림과 시를 한 화폭에 자유롭게 표현한 이 작품은 그의 화풍의 진가를 보여준다.

가오리, 1972, 종이에 파스텔, 44×37㎝./경남도립미술관 소장/
가오리, 1972, 종이에 파스텔, 44×37㎝./경남도립미술관 소장/

가오리 가오리

나를 달머 못난 새야

波市(파시)에 가서 탁배기 한 잔 어더 먹고

五色(오색) 구름 헤치며 하늘 높이 솟아라

自像(자상화)


특히, 강신석은 ‘꽃’의 시인 김춘수(金春洙, 1922~2004)와 인연이 깊었다. 1953년 마산 백랑다방에서 ‘김춘수·강신석 시화전’을 개최해 ‘오랑캐꽃’ 등 20여 점의 시화를 발표했다는 기사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의 시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들의 시화 중 이미지를 알 수 있는 건 25년 후 대구에서 다시 열린 ‘김춘수·강신석 시화전’의 출품작 ‘부재(不在) : 시화’가 유일하다. 이 작품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그 무상함을 표현한 김춘수의 시와 강신석의 텅 빈 찻사발이 인생무상을 나타내는 쓸쓸함을 고조시킨다. 김춘수는 이 마지막 시화전의 수익금 300만 원을 모두 강신석에게 주어 그가 뉴욕에 이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강신석 그림·김춘수 글, 부재(不在) 시화, 1978, 종이에 파스텔과 펜, 40×31㎝. /개인 소장/
강신석 그림·김춘수 글, 부재(不在) 시화, 1978, 종이에 파스텔과 펜, 40×31㎝. /개인 소장/

이처럼 강신석은 제2의 고향이었던 마산의 정취를 자신만의 감성으로 화폭에 담아냈던 화가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작품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추가적인 작품 확보가 절실하다. 더불어 그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마산의 여러 다방과 화랑을 배경으로 문화예술인의 영향 관계 역시 파악할 수 있어 경남의 근현대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속 조사와 연구 기회가 있길 바란다.

※자료를 제공해 주신 최태호 선생님, 정서연 학예연구사님,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에 감사드립니다.

안진화(학예연구사)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