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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참가자들이 본 6월 민주항쟁

“민주함성 거셌던 그날, 마산은 하나였다”

“거리로 나온 학생·노동자와 시민 모두가 함께했던 싸움”

기사입력 : 2017-06-08 22:00:00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수십 년에 걸친 군부독재와 5공화국 폭압을 국민의 힘으로 청산한 한국 현대사에 자랑스러운 순간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민은 이를 통해 대한민국 역사상 아홉 번째의 개헌을 일궈냈고, 민주적인 시민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분기점이 됐다. 6월 민주항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가 바로 3·15 의거와 부마민주항쟁의 ‘민주성지’ 마산이다. 6·10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당시 시위 최전선에 섰던 참가자들의 증언을 통해 87년 6월 10일 마산을 돌아보고, 항쟁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일이었던 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이날 전국 22개 도시에서 집회를 열기로 하고, 전국 각 대학 총학생회도 동참을 결의했다. 전날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열린 사전집회에서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직사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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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10일 마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한국과 이집트 축구경기가 최루탄 가스로 인해 중단되자 관중들이 골대 그물망을 벗기고 본부석을 뒤엎고 있다./6월민주항쟁계승경남기념사업회/

갈 데까지 간 권력에 대한 분노는 마산에서도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당시 경남대 총학생회장 당선자였던 박재혁(56) 6월민주항쟁정신계승 경남사업회장은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10일 오후 6시 3·15의거탑에서 시민·학생들이 모이는 6·10마산대회를 열기로 했죠. 오후 3시 교내 10·18광장에서 사전 집회를 열고 대오를 짜는데 150여명 안팎에 그쳤습니다. 대열을 이끌고 도서관으로 뛰어들어가 ‘지금은 펜보다 돌을 들어야 할 때’라고 소리쳤습니다. 대열을 이끌고 정문으로 향하니 그곳에서 학생들이 어떤 남자를 붙잡고 웅성거리고 있었는데, 잠시 후에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직원이란 걸 알게 됐습니다. 제가 ‘그러면 차 불 태워라’고 말하고 화염병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때부터 모인 학생이 3000여명으로 불어났고, 그 대열을 이끌고 오후 5시쯤 3·15의거탑으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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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을 보도한 본지 6월 12일자 기사


3·15의거탑으로 가는 길 곳곳에서 ‘길을 열어달라’는 시위대와 최루탄을 던지며 맞서는 경찰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다. 마산을 ‘디비지게’ 만들어 국내외 이목을 집중시킨 건 마산공설운동장 ‘최루탄 사건’이었다.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허진수(62)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장은 “한국 A대표팀과 이집트의 대통령배 A매치 경기 중 전경이 던진 최루가스가 시위대로 흐르지 않고 경기장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경기가 무산됐다. 관중들이 환불을 요구하고, 골대도 옮겨버리는 등 흥분한 와중에 전국에 생중계되던 경기가 중단되면서 큰 이슈가 됐다”고 했다.

당시 대기심으로 경기장에 있었던 장기팔(62) 전 경남축구협회 부회장은 “경기장까지 최루탄가스가 들어올 줄은 몰랐다“며 “우리 선수들은 멀쩡한데 최루가스를 처음 접한 이집트 선수들이 바닥에 뒹굴기도 하고 코를 막은 채 경기장을 빠져나갔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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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역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


같은 시간, 시민·학생은 물론 퇴근에 맞춰 합류한 한일합섬 노동자들, 여기에 ‘시청에 환불받으러 가자’는 관중까지 결합하며 3만명이 넘는 큰 대오가 형성되면서 경찰이 통제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관중들은 처음엔 환불이 목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독재타도’, ‘호헌철폐’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3만여명은 항쟁의 동력이 됐다.

당시 창원대 1학년이었던 조명제(50) 6월민주항쟁정신계승 경남사업회 사무처장은 시위대 선두에 있었다.

조 사무처장은 "당시 가야백화점 인근 우병규 의원 사무실 앞에서 전경들과 대치하며 투석전을 벌이고, 양덕파출소 앞에서 전두환 사진을 누군가 불태웠던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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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6일 마산 중앙로에서 경찰과 대치 중인 시위 군중들.

6월 항쟁이 위대한 것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학생·노동자들과 이들을 박수로 지지해준 이름 모를 시민들 모두가 함께한 싸움이었기 때문이라고 참가자들은 입을 모은다.

박재혁 회장은 "시민들이 수고한다고 시위대에 빵과 우유를 건네주고, 전경을 피해 도망치는 학생을 집에 숨겨주며 꼬깃꼬깃한 1000원짜리 지폐를 손에 쥐여주기도 했다"며 "시위에 나서지 않은 시민들도 모두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넘쳤다"고 말했다.
 
허진수 회장도 "3·15의거와 부마민주항쟁을 몸소 경험한 시민들이었기에 그 정신이 6월 민주항쟁에도 이어진 것"이라며 "1987년 6월 10일, 그날 마산의 함성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민주주의를 우리 손으로 이룩했다는 자부심으로 마산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도영진 기자 doror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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