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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념일 제자리 찾은 1979 부마항쟁] (중) 잊혀져가는 그날의 함성

학생 ‘항쟁 불길’ 당기고 시민 ‘시위 열기’ 이었다

마산시민·학생 1만여명 참여

기사입력 : 2019-10-14 20:58:14

우리의 불꽃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되어/ 거리와 골목/ 교정과 광장에서/ 민중의 손에 들려/ 노동자와 농어민/ 도시 빈민과 진보적 지식인/ 학생들의 손에서 거대한 불꽃으로 불기둥 되어 하늘을 찌르며 타올랐다. (임수생, 거대한 불꽃 부마 민주 항쟁)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항쟁은 시작됐다. 이는 18일 마산으로까지 이어졌다. 대학생들만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물론 시민들까지 합세했다. 유신체제 하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의 저항으로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정부에 정면으로 맞선 민주항쟁이었다.

◇유신독재 반대 깃발 든 학생들

“학우 여러분!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지금 우리는 1시간 이상을 이렇게 멍청히 앉아만 있습니다. 도대체 지금 이렇게 앉아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경남대의 모습입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경남대만 과거 유신헌법을 유일하게 전국대학 중에서 지지했다는 치욕적인 이유로 현재 전국 대학생연합회에조차 가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지금 부산에서는 연 이틀 동안 우리의 학우들이 피를 흘리며 유신독재에 맞서 처절히 싸우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이렇게 앉아만 있다니 기가 찰 일입니다.”

1979년 10월 18일 오후 2시 경남대학교 도서관 앞에 모인 1000여명의 대학생들은 어느 대학생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이에 동조한 학생들은 ‘민주회복’, ‘독재타도’ 등 구호를 외치며 어깨동무를 하고 교문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경찰에 의해 교문 앞에서 가로막힌 학생들은 ‘오후 5시에 3·15의거탑에서 재집결하자’는 누군가의 외침에 흩어져 마산시내로 진출했다.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마산지역의 항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1979년 10월 18일 시위 학생 일부가 시내로 나가자 경찰이 경남대 정문을 가로막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1979년 10월 18일 시위 학생 일부가 시내로 나가자 경찰이 경남대 정문을 가로막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항쟁의 주역은 일반 시민들

학생들이 항쟁의 불길을 당겼지만 그 이후의 거리시위는 노동자와 상인 등 일반시민이 주도했다. 시위에 나선 학생들이 경찰의 제지로 와해되는가 싶었지만 퇴근 시간 이후 많은 마산시민들이 참여하면서 시위 열기가 되살아났다. 마산의 시위는 부산보다 더 격렬했다.

마산시 중심가인 창동, 부림시장, 오동동, 불종거리 일대 번화가에는 1만여명의 시민·학생들이 모여 시가지를 가득 채웠다. 시민들은 경찰이 난폭하게 진압에 나서자 더욱 격렬하게 맞섰으며, 당시 공화당 경남지부 사무실을 공격했다.

또 시내 곳곳의 파출소를 습격해 박정희의 사진을 떼어 내 찢어버리고 짓밟았다. 이 시위는 이틀 동안 이어졌고, 다급해진 박정희 정부는 10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또 20일 정오를 기해 마산에는 ‘위수령’을 선포, 공수부대와 39사단 병력을 동원해 시민들을 강경진압하면서 무차별로 구타하고 폭행했다.

이로 인해 부산에서는 1058명이 연행돼 6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고, 마산에서는 505명이 연행돼 59명이 군사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시위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가담해 연행됐던 사람들 대다수가 일반인이었다는 점은 부마민주항쟁의 주역이 일반 시민들이라는 것을 입증해 준다.

시민들이 마산역에서 진압대에 맞서 시위를 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시민들이 마산역에서 진압대에 맞서 시위를 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정의로운 도시 ‘마산’을 기억하라

마산은 정의로운 도시다. 지금까지 두 번이나 독재 권력을 무너뜨렸다. 3·15의거가 그랬고 부마민주항쟁이 그렇다. 3·15의거는 마산에서 일어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는 계기를 마련한 국가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었고 이는 1979년 부마민주항쟁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부마민주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그로 인한 여파는 적잖았다. 견고했던 유신체제는 내부 분열로 치닫기 시작했고 10·26사태를 끝으로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요구가 지금의 사회에서 계승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뒤따라야 한다. 시민들의 요구로 민주주의는 진전되어 왔지만 사회적 약자들과 노동자들은 경제적 양극화와 자본가들의 횡포에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어쩌면 그들이 희망했던 ‘한국사회’를 만들기 위한 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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