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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당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신지영(창원중부경찰서 여성청소년계장·경감)

기사입력 : 2020-10-18 20:23:54

살인, 절도, 사기, 폭력, 명예훼손. 각양각색의 범죄를 저지른 자와 피해를 입은 자, 또 이를 수사하는 경찰이 매일 밤낮으로 드나드는 경찰서. 눈에 띄게 힘겨운 발걸음이 떠밀리듯 들어온다. 푹 눌러쓴 모자 아래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해 하얀 밤을 지새웠을 눈이 어린다. 얼마나 울었는지 퍼렇게 멍든 뺨보다 눈두덩이 더 부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밤의 기억을 속속들이 돌이킬 걱정에 어깨는 한길 아래 처져 있지만 주먹만은 야무지게 움켜쥐고 있다. 어금니를 한번 꽉 깨물고서야 바싹 마른 입술을 겨우 뗀다. 억지로 나오다 다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흐느낀다. ‘성폭행 신고하러 왔어요.’

성폭행 피해자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여전히 막막하다. ‘힘드시지요’는 그가 느꼈을 막대한 절망과 공포,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슬픔과 분노를 껴안기에 버겁고, ‘큰 용기를 내셨네요’는 경찰서 높은 첨탑을 올려보며 자꾸만 뒤돌아서려는 제 발걸음을 잡아끌었을 그를 격려하기에 경박하다. 가슴이 먹먹하여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쓴 믹스커피만 한잔 내민다.

‘내가 왜 그 시간, 그 장소에 혼자 갔을까’, ‘내가 더 격렬하게 저항했어야 했는데….’, ‘성폭행을 당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야.’ 고통스럽고 억울한 것은 모든 피해자의 하나같은 마음이겠지만 많은 성폭행 피해자는 여기에 하나의 짐을 더 안고 간다. 편견과 낙인이 두려워 피해를 당하고도 큰 소리로 아프다 말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며 죄책감마저 느낀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부끄러워하며 평생을 살아간다.

성폭행은 ‘상대방의 동의 없이 강제적으로 성관계를 맺는 행위’이다. 육체적인 폭력이나 사회적 지위·경제적 능력 등 상대적으로 우월한 힘으로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여 정신적·육체적으로 큰 피해를 주는 중범죄이다. 가해자와의 힘의 차이로 인하여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을 겪은 피해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수치심과 죄책감은 모두 가해자의 몫이다. 지금이라도 주인을 잘못 찾은 못된 마음의 자리를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

신지영(창원중부경찰서 여성청소년계장·경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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