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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이역] 묵집에서- 장석남

기사입력 : 2024-03-14 08:04:44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오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 ‘묵’이라는 음식을 아시는지요. 알맞게 잘라서 간장에 찍어 먹거나 가늘게 썰어서 멸치국물에 말아 후루룩 국수처럼 들이켤 수 있는데요, 입안에 와 닿는 매끄러운 촉감과 물컹하게 씹히는 맛이 일품인 전통음식입니다. 도토리묵 메밀묵 가리지 않고 묵은 생각만 해도 심신이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별미로 즐기기에 좋고 부담 없는 한 끼의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묵의 재료를 수확하는 등 묵을 쑤는 과정에 참여해 본 사람은 가난과 고통을 먼저 떠올릴 수도 있을 겁니다.

작가는 묵에서 사랑을 보고, 묵의 매끄러움에서 사랑의 대상을 떠올리고, 묵을 집는 수저질에서 사랑의 행위를 느꼈나 봅니다. 특히 젓가락으로 묵을 집을 때 집힐 듯 말 듯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묵의 모습에서 사랑의 조심스러움과 사랑의 위태로움을 실감하게 합니다. 무섭도록 고요한 분위기를 풍기는 묵집의 표정, 여러분은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요. 예스러운 어조에 담겨있는 오래된 추억이나 아슬아슬한 사랑 한 토막, 묵을 드시듯이 건져 올리면 묘미가 있는 작품입니다. 최석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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