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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위한 헌신, 경남 참전 영웅을 찾아서] ⑨ ‘법대생 출신 학도병’ 박동군씨

“포로로 붙잡혀 총알받이서 탁월한 기지 발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

기사입력 : 2024-05-01 20:53:46

의령 부유한 가정서 판·검사 꿈꾸며 자라
동아대 법대 진학 후 전쟁 터져 자원입대
일주일 훈련 받고 경북 영천 전투 투입

횡성 전투서 중공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혀
인민군에 넘겨져 전투 때 총알받이 되기도
탈출 중 잡혔으나 북한 말투 흉내로 살아나

백마고지 등 다수 전투 참전 후 휴전 맞아
“꿈 못 이뤘지만 조국 지킨 것이 최고 기쁨
자유 대한민국 어떻게 지켰는지 꼭 알아야”


“인민군에게 잡혔을 때 ‘아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어. 그때 탈출 못 했으면 북한 사람이 됐거나 죽었겠지.” 최근 방문한 6·25참전영웅 박동군(94)씨 댁. 벽에는 전쟁 때 공을 인정받아 수여된 각종 표창장과 유공자회 활동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표창장과 사진들에는 전쟁과 박동군씨의 애국심이 담겼다. 마을에서 수재 소리를 듣던 그가 전쟁에 참전해 인민군 포로가 되고 탈출한 이야기는 영화 속 장면과 같다. 전쟁 때문에 대학을 중퇴해 원하던 꿈을 못 이뤘다. 그래도 그는 지금이라도 전쟁이 나면 나서 싸우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자부심이 크다.

박동군 6·25 참전유공자가 1951년 2월 8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강원도 횡성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후 탈출 때까지 겪은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박동군 6·25 참전유공자가 1951년 2월 8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강원도 횡성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후 탈출 때까지 겪은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판사 꿈꿨던 법대생, 총을 들다= 박동군씨는 고향인 의령에서 천재로 유명했다. 시험을 치면 항상 1등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의령에서 크게 농사를 지었기에 가정환경도 부유했다. 당시 부산과 경남에서 유일하게 법대가 있던 동아대 진학에 성공했다. 그의 꿈은 법대를 졸업해 판사나 검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학교 1학년 때 전쟁이 터지면서 법전 대신 총을 들어야 했다. 1950년 9월 그는 대학 동기들과 자원입대를 결정했다. 밀양 삼랑진 모래사장에서 일주일간 훈련을 받았다. 훈련받을 때 쏜 총알은 겨우 ‘8발’이었다. 짧은 훈련이 끝나고 8사단으로 배치된 그는 경북 영천 전투에 투입된다. 그는 기관총 사수로 전투에 뛰어들었다. 영천 전투는 낙동강 전선 마지막 전투였다. 영천이 함락되면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지만, 극적으로 탈환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자진 입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였어. 방위군들이 군대 안 가면 다 잡아갔지. 영천 전투에 투입되니 인민군들이 국군이나 민간인들을 죽여서 전봇대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더라고. 그 모습이 얼마나 처참하던지.”

이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면서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그는 평양 부근 강동 지역까지 이동했지만,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다시 후퇴했다. 연천까지 온 뒤, 다시 충청도 지역까지 내려갔다. 중공군이 파죽지세로 내려오면서 제대로 전투도 못 치르고 후퇴해야 했다.

1952년 기관총 사수였던 박동군(오른쪽) 6·25참전유공자가 전우 부사수와 찍은 기념사진.
1952년 기관총 사수였던 박동군(오른쪽) 6·25참전유공자가 전우 부사수와 찍은 기념사진.

◇횡성 전투에서 포로로 붙잡혀= 1951년 2월 횡성에 중공군이 쓰나미처럼 몰려들었다. 중공군들은 나팔을 불며 국군 진지로 달려왔다. 개인장비가 거의 없어 몸이 가벼웠기에 굉장히 빨랐다. 국군은 공격 작전 중이라 횡성에 제대로 된 방어진지와 방어선을 구축하지 않았다. 국군 8사단은 주변 사단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고, 예비대도 없었다. 중공군은 공격 전부터 이미 일부 병력을 횡성 일대에 잠입시켜 전투를 준비했을 정도로 치밀했다.

1951년 2월 11일 밤 중공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또 국군 방어선이 약하다는 점을 노려 퇴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국군은 전투가 시작된 지 몇 시간 만에 완전히 포위됐다.

일부 국군 병력이 후퇴를 시도했지만 퇴로에서 매복 중이던 중공군에 의해 저지됐다. 국군을 지원 중이던 미군도 고립됐지만, 중화기와 중장비를 버리고 후퇴해 살 수 있었다. 전투 중 탈출한 8사단 병력은 3000여명에 불과했다. 이 중 대다수가 후방 병력인 점을 고려하면 전투에 투입된 사단 전체가 괴멸된 것이다.

당시 횡성을 지키던 국군의 환경도 열악했다. 횡성의 겨울은 무척 추웠지만, 제대로 된 방한용품도 없었다. 주먹밥도 꽁꽁 언 채로 고지를 지키던 병사들에게 배급됐다. 병사들은 주먹밥과 눈을 섞어 뜨거운 물에 녹여 먹었다.

“가슴팍까지 눈이 쌓였을 정도로 많이 왔어. 배달된 밥도 돌멩이 같았지. 바로 앞에 있는 전우가 녹인 주먹밥을 숟가락으로 퍼먹다가 포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었어. 숟가락을 깨물고 있는 전우 시신이 아직도 눈에 생생해.”

박동군 6·25 참전유공자./김승권 기자/
박동군 6·25 참전유공자./김승권 기자/

고지를 지켰던 그는 중공군 포위를 뚫지 못하고 포로로 잡힌다. 8사단 병력 상당수가 포로로 붙잡혔다. 중공군들은 포로들을 인민군에게 넘겼다. 인민군들은 포로들을 수용소로 보내지 않았다. 포로들을 인민군복으로 갈아입히고 소수로 나눠 중대에 배치했다. 전투 시 ‘총알받이’로 포로들을 썼다. 소수로 나눈 이유는 혹여 있을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가 겪은 일주일간 포로 생활은 크게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인민군들의 고문은 없었고, 밥도 잘 챙겨줬다. 훈련도 며칠 받았는데 사상교육이 중점이었다. 왜 북한이 전쟁에 승리해야 하는지, 대한민국 체제 문제성 등을 교육받았다.

인민군들은 밤에 주로 이동했다. 인민군복을 입고 행진할 때 그는 몰래 풀숲으로 도망갔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뛰다가 다시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죽을 뻔한 위기였다. 그는 기지를 발휘해 북한 말투로 “내래 총알받이 신세로 행진 중이야”라고 말했다. 다행히 그는 의심받지 않아 다시 탈출할 수 있었다.

낮에는 숨어있다가 밤에 조용히 움직였다. 그러던 중 바위틈에서 “누구야”라고 국군이 외치며 총을 겨눴다. 그는 인민군복을 입고 있었기에 중대 본부로 붙잡혀 취조받았다. “당시 중대장이 내 뺨을 때리며 취조했어. 군번과 소속을 정확히 말하니 내가 국군이라는 것을 믿더군. 그래도 다시 강릉 포로수용소로 갔다가 조사를 받은 뒤 부대에 배치됐지. 나는 탈출에 성공해 대한민국에 있는 거고, 포로로 남았던 전우들은 북한에 있거나 죽었을 거야.”

박동군 6·25 참전유공자가 1951년 2월 8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강원도 횡성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후 탈출때까지 겪은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박동군 6·25 참전유공자가 1951년 2월 8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강원도 횡성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후 탈출때까지 겪은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다시 전선으로= 이후 그는 다시 9사단으로 배치되어 백마고지 전투를 치르게 된다. 당시 그는 대학에 다니던 중 입대해 학력이 부대 내에서 좋았다. 또 글을 잘 썼기에 행정병으로 뽑혀 중대본부에서 근무했다. 그의 임무는 백마고지에서 전사한 전우들의 시신을 옮겨 서울 서대문구에서 화장하는 것이었다. “밤에 주로 전투하고, 낮에는 안 하니 그때 전우들 시신을 수습했지. 고지 밑 고랑까지 시신이 쌓여 있을 정도로 많이 죽었어. 전투에 투입된 병사들이 거의 다 죽었다고 보면 돼.” 그는 백마고지에 참전한 공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55년 철원에서 근무하던 시절 박동군(왼쪽)씨.
1955년 철원에서 근무하던 시절 박동군(왼쪽)씨.

전투 후 몸이 좋지 않았던 그는 후방 병원에서 잠시 치료를 받은 뒤 다시 서부전선으로 배치됐다. 그리고 얼마 뒤 휴전을 맞는다.

이후 1956년 상사로 전역했다. 그가 지금까지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전쟁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전쟁이 안 일어나 대학을 졸업했으면 판사나 검사를 했을 텐데. 아쉽지만 어쩔 수 있나. 그래도 나라를 구했는데. 다행히 동아대에서 나같이 전쟁 때문에 졸업을 못 한 사람들에게 명예 수료증을 줬어. 그나마 그게 위안이 돼.”

동아대 법학과 재학중 참전으로 학업이 중단된 박동군 6·25 참전유공자가 지난 2005년 11월 동아대에서 받은 수료증을 들어보이고 있다./김승권 기자/
동아대 법학과 재학중 참전으로 학업이 중단된 박동군 6·25 참전유공자가 지난 2005년 11월 동아대에서 받은 수료증을 들어보이고 있다./김승권 기자/

그의 가정은 정부에서 선정한 ‘병역명문가’이다. 병역명문가는 3대가 모두 현역으로 군 복무해야 선정될 수 있다. 그는 은퇴 이후에 6·25참전유공자회 의령 지회장을 맡으며 전우들의 복지 증진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그는 미래 세대들에게 애국심을 강조했다. “요새 친구들은 전쟁을 몰라. 어떻게 자유 대한민국을 지켰는지 알아야 해. 나뿐만 아니라 우리 애들, 손자들도 전쟁이 나면 총을 들 거야. 비록 전쟁 때문에 나의 꿈은 못 이뤘지만, 조국을 지켰어. 내 인생 최고 기쁨이야.”

박동군 6·25 참전유공자가 부인과 함께 활짝 웃어 보이고 있다./김승권 기자/
박동군 6·25 참전유공자가 부인과 함께 활짝 웃어 보이고 있다./김승권 기자/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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