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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계절은 무슨 맛일까?- 채도운(작가, 서점 보틀북스 대표)

기사입력 : 2024-03-21 19:34:14

경남 진주 문산읍에서 자그마한 서점 겸 카페 ‘보틀북스’를 운영하며,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일기로 적기 시작했다. 직장인이었다가 자영업자가 된 나의 변화, 하루 매출 0원이 주었던 좌절감,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삶을 살아낼 용기를 주었던 손님들과의 일화. 이 모든 일상들이 한 편의 글이 되었고, 그 글이 모여 〈엄마는 카페에 때수건을 팔라고 하셨어〉 라던가 〈나는 계속 이 공간을 유지할 운명이었나 봐요〉 라는 책이 탄생하게 되었다. 책이라는 것이 완성된 형태로 보일지라도 실은 굉장히 불완전한 것으로서, 아직도 나는 책 밖 세상이 펼쳐주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차곡차곡 일기로 담아내고 있다.

언젠가 나는 ‘계절은 무슨 맛일까?’하고 궁금해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어느 날 한 손님이 우리 서점&카페에 방문했다.

손님 앞에는 한 잔의 차가 놓여져 있었다. 뜨거운 열기를 내뿜던 페퍼민트 위로 아롱거리던 연기가 어느새 잠잠하다. “딸기를 인터넷으로 판매하려고 하는데, 이만 저만 어려운 게 아니네.” 휴, 하는 그 한숨 사이들이 따스함을 몰아낸 것일까. 내 앞에 앉아있는 이는 우리 독서모임의 멤버이자 문산읍의 이웃주민, 그리고 딸기농장의 농부이기도 하다. “택배회사도 계약을 절대 안 해줘. 두 배를 불러도 소용이 없으니.” 나는 깜짝 놀랐다. “두 배를 올려도요?” “응, 딸기는 생물이잖아” 나는 ‘생물’이라는 단어 앞에 늘 움찔거리게 된다. 딸기를 지칭할 때의 ‘생물’이라는 게 신선한 물건을 뜻하지만, 그 근본에는 생(生)이 있기 때문이다.

딸기 농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시어머님의 말이 불쑥 튀어나온다. “한 번의 손짓으로도 자국이 남고 물러지는 게 딸기야. 그러니까 딸기를 대할 때 온 집중을 다해야 해.” 한 생물인 딸기를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나 조심스러운데, 다른 이의 생을 대할 때는 얼마나 극진해야 하는가.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 딸기 언니가 다시 서점에 들렀다. “이 시간에 웬 일이에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내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상자를 내 앞으로 내민다. 딸기와 새하얀 딸기꽃이 그려진 박스는 예쁘게 손잡이까지 달려있었다. 어떠한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딸기의 포장재를 고르고,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고, 유통과 판매에 대해 고민하며 여러 지역을 오갔던 그녀의 노력의 결과물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마수걸이* 해줄게요!”라고 지갑을 꺼내드는 나를 피해 부리나케 도망가는 그녀를 웃으며 바라본다. 예쁘게 나오자마자 내게 들고 왔을 그녀의 발걸음을, 박스를 건네받으며 느껴졌던 그녀의 손길이, 힘들었지만 또 행복하기도 한 지금의 순간을 누리고 있을 그녀의 눈빛이 아름답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싱그럽고 큼지막한 딸기를 베어 물며 생각한다.

봄에는 나물을 캐 오는 할머니로부터 매주 천 원어치 검은 봉지를 건네받아, 식탁을 봄내음으로 차린다. 여름에는 과수원을 운영하는 손님으로부터 무농약 복숭아를 사 와 무더위를 아삭하게 견뎌낸다. 가을에는 토마토와 단감으로 건강을 챙겼었는데, 이제부터 겨울엔 이 딸기가 식탁에 오르겠구나. 진주의 문산읍, 이 시골마을에서 나는 이웃으로부터 늘 계절을 선물 받는다. 매 일상을 계절을 먹고 살게 된다.

*마수걸이: 맨 처음으로 물건을 파는 일을 뜻하는 순우리말.

채도운(작가, 서점 보틀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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