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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순신 유적지 한산도 발굴조사해야- 이봉수(이순신전략연구소장)

기사입력 : 2024-04-25 19:34:29

4월 28일은 이순신 장군 탄신 기념일이다. 해마다 이날이 되면 아산 현충사에서 충무공 탄신다례제가 거행된다. 이순신 장군의 일생을 살펴보면 1545년 서울에서 탄생하여 청소년 시절은 외가가 있는 아산에서 보냈다. 32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함경도와 서울,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서 근무하다가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에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1592년 4월 13일(음력)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 장군은 개전 첫해에 옥포, 당포, 한산도, 부산포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왜적의 서진을 막기 위해서는 견내량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1593년 7월 여수에서 한산도로 진을 옮기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했다. 이러한 내용은 선조실록과 이순신 장군이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자세하게 나온다.

임진왜란 7년 전쟁 기간 중 이순신 장군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 한산도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한산도에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지명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염전이 있었던 대고포, 군량미 창고가 있었던 창동, 조선수군 주력이 진을 치고 있었던 진두, 무기를 만들었던 야소, 군복을 만들고 수선하던 의암, 군수품 하역을 하던 하포, 진법훈련을 하던 장작지, 많은 왜군의 목을 벤 두억, 개미목 의항, 문어포 등이 모두 조선수군과 관련이 있는 지명들이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한산도에서 있었던 여러 일화들이 나온다. 여수에서 한산도로 진을 옮기기 전 최초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곳은 걸망포(巨乙望浦, 통영시 산양읍 신전리 신봉 마을)였다. 걸망포에서 한산도를 들락거리다가 한산도 두을포에 삼도수군 통제영을 설치했다. 난중일기에는 활터에서 명나라 장수 장홍유를 접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수루에는 방이 있었고, 실화로 인한 화재가 나서 수루와 근처에 있던 관청이 모두 소실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충청수군이 진주한 곳에는 목책을 쳐서 방비했다는 기록도 있다. 전라우수사가 있는 곳의 건물이 화재가 나서 타버렸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런 단편적인 기록만으로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영의 실체를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우리는 400년 이상 매몰되어 있는 한산도의 역사를 밝혀내야 한다. 그 방법은 발굴조사를 하는 것이다. 대규모 발굴조사를 통하여 우리나라 최초 삼도수군통제영의 실체를 밝혀야 한다.

조그만 택지개발 사업을 하다가 지석묘 하나만 나와도 공사를 중지시키고 발굴조사를 하는데, 조선수군의 거대한 유적지 한산도를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참고로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 때 약 1년 정도 머물렀던 고금도는 이미 발굴 조사를 마치고 고금진의 실체를 밝혀냈다. 경상남도와 통영시의 분발을 촉구한다.

이봉수(이순신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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