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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한미동맹의 시발점, 서북산전투- 강호증(경남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기사입력 : 2024-04-29 19:35:46

서북산전투는 6·25전쟁 당시 전라남도를 우회하여 진주를 거쳐 낙동강 방어선 최남단인 마산으로 향하던 북한군 6사단과 7사단을 격퇴하기 위해서 마산서부지역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19차례나 고지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전투였지만, 아군의 승리로 북한군의 부산 점령 기도를 좌절시키고, 대구 방면의 적 압력을 분산시켜 낙동강 방어선 사수가 가능해졌으며,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수세에서 공세적인 반격작전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북산전투는 최초의 한미연합작전임과 동시에 한미동맹 출발점으로서 의의가 있다. 대구 북방 상주에서 급파된 미 25사단이 전투의 주축이었지만, 한국군도 김성은 해병부대를 포함하여 미군과 BUDDY시스템을 구축했던 카투사, 지게로 탄약과 물자를 보급했던 노무단, 유격부대인 KLO, 전투경찰, 학도병 등 이름 모를 많은 사람들이 참전하여 피와 눈물을 흘렸다. 미군도 많은 희생이 있었다. 당시 미 25사단에 근무하던 티몬스 대위는 중대원과 함께 서북산 고지를 사수하던 중 적의 습격으로 전사하였다. 그가 전사할 당시 미국에 있던 7살 아들 리처드 티몬스는 훗날 군인이 되어 주한 미 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했으며, 손자인 리처드 티몬스 2세도 미 육군 대위로 판문점 인근 초소에서 근무하였다. 이처럼 서북산전투를 통해 형성된 한미 양국의 혈맹 관계는 전쟁이 끝난 1954년, 북한의 남침과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발효시킴으로써 한미동맹의 법적 기반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서북산전투의 의의와 중요성에 대해 많은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전투가 발생한 지역이 행정구역의 잦은 변경과 지역사회 무관심 등으로 많은 조명을 받지 못했는데, 다행히도 최근 지자체와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국회 공청회와 기념관 건립을 위한 용역사업 등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필자도 교수로서 부산·울산·경남지역에서 유일하게 육군과 협약을 맺은 경남대 군사학과 학생들에게 서북산전투에 대한 전사교육과 답사를 매년 실시하고 있으며, 올해에는 드론을 이용한 전적지 답사를 학생들과 함께하여 지역 전사를 널리 홍보하고 연구하는 계기로 활용해야겠다.

강호증(경남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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