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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국가산단 50주년 특집- 터줏대감 기업 탐방] (2) 두산에너빌리티

현대사 풍파 이겨내고 세계 최고 기술력으로 ‘우뚝’

기사입력 : 2024-05-08 08:07:09

1976년 현대양행으로 창원기계공장 착공
1980년 신군부 조치로 한국중공업 공기업화
1982년 세계 최대 규모로 창원공장 준공
발전시장 위기 후 2001년 두산重으로 민영화
탈원전 정책 이후 현재 사명으로 바꾸고
가스터빈·수소·친환경 사업으로 성장 가도


창원국가산단 내 두산에너빌리티는 설립 이후부터 지금까지 부침이 많았다. 국가 기간 산업을 영위하며 급변하는 현대사의 풍파를 그대로 이겨내야 했다. 이 경험은 지금의 세계 최고 기술력을 가진 두산에너빌리티가 있게 한 원동력이 됐고 최근 그 능력을 검증해 보이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변천사를 살펴봤다.

1976년 창원국가산단 내 옛 한국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 공장 신축 모습./경남신문DB/
1976년 창원국가산단 내 옛 한국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 공장 신축 모습./경남신문DB/
두산에너빌리티 공장이 들어서기 전 1976년 창원 귀곡동 모습./두산에너빌리티/
두산에너빌리티 공장이 들어서기 전 1976년 창원 귀곡동 모습./두산에너빌리티/

◇두산에너빌리티 창원공장의 시작= 두산에너빌리티 모체는 현대양행이다. 현대양행은 1976년 11월 초 창원종합기계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공사는 속도전이었다. 이미 수주한 물량 생산을 위해 부지조성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공장 착공이 이뤄졌다. 1977년 9월 보일러공장(제관공장)이 먼저 가동을 시작했고 12월에는 기계공장이 부분 가동됐다.

1979년 두산에너빌리티(당시 현대양행) 창원공장 건설이 중단된 모습./두산에너빌리티/
1979년 두산에너빌리티(당시 현대양행) 창원공장 건설이 중단된 모습./두산에너빌리티/

현대양행 창원공장은 1979년 제2차 석유파동, 박정희 대통령 암살, 신군부의 등장 등의 혼란으로 건설에 차질을 겪는다. 신군부는 대우로 발전설비를 일원화했고 대우는 현대양행 경영권 인수 직후인 1980년 9월 23일 회사 이름을 한국중공업으로 바꾼다. 이어 대우의 자금 문제로 인해 정부는 직접 투자를 결정, 한국중공업을 공기업화한다. 1981년 11월 단조공장이 준공되고 이듬해 1월 8일 단조공장에서 첫 쇳물을 녹여내기 시작하며 창원공장은 점차 본궤도에 오르게 된다.

1982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 창원공장 준공식 모습./두산에너빌리티/
1982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 창원공장 준공식 모습./두산에너빌리티/

1982년 12월 14일 두산에너빌리티 창원공장 1만3000t 프레스 가동식./두산에너빌리티/
1982년 12월 14일 두산에너빌리티 창원공장 1만3000t 프레스 가동식./두산에너빌리티/

1982년은 한국중공업에 의미가 있는 때였다. 이때 서울에 있던 본사를 창원으로 이전했다. 이는 경영 정상화를 위한 현장 중심의 경영 전략이었다. 또 이 해에 창원공장의 준공식이 열려 대규모 중공업 기지가 착공 5년 8개월 만에 완성된다. 당시 창원공장은 ‘공장을 만드는 공장’, ‘세계 최대 규모의 기계생산 백화점’ 등의 수식어가 붙었다. 총공사비 3810억원이 투입됐고 이는 현재로 따지면 수조원이 넘는 규모다. 부지 면적은 5.29㎢(160만평)로 현재 창원 성산구 중앙동 전체 면적보다 넓고, 건축면적은 53만8842㎡(16만3000평)였다.

창원공장은 주조, 단조, 중장비 등 7개의 대단위 공장과 각종 부대시설을 갖췄다. 주생산 품목은 원자로·터빈발전기·보일러 등 발전설비의 주기기와 보조기기, 제철·제강·석유화학설비 등 대형 산업플랜트 설비, 불도저·로더 등 건설 중장비 등이었다. 소재부터 완제품까지 일관 제작이 가능했다.

1985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이 해수담수화 플랜트를 첫 수주 후 1987년 설비 출하식 모습./두산에너빌리티/
1985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이 해수담수화 플랜트를 첫 수주 후 1987년 설비 출하식 모습./두산에너빌리티/

◇11년 만에 경영정상화= 한국중공업의 경영난은 창원공장 완공 후에도 지속됐다. 수주 물량은 적었고, 해외 수주 프로젝트들은 외형적 성장과 기술력 축적에 도움이 됐지만 실적으로 따지면 적자를 기록했다. 1987년 한국전력이 신규 발전소 발주를 늘리면서 한국중공업 실적은 힘을 받기 시작했다. 1987년 수주실적 8870억원 가운데 한국전력 발주 물량이 5600억원으로 전체의 63%를 차지했다.

한국 최초의 1000㎿ 대용량 원전인 영광원전 3, 4호기 주기기 공급계약식 모습(1987년)./두산에너빌리티/
한국 최초의 1000㎿ 대용량 원전인 영광원전 3, 4호기 주기기 공급계약식 모습(1987년)./두산에너빌리티/

1991년 한국중공업은 흑자전환을 실현, 출범 11년 만에 경영정상화를 이뤘다. 한국중공업의 1990년대 중반은 흑자전환으로 기업 체질이 강화되면서 도약을 위한 준비가 이뤄졌다. 특히 1995년 총매출액이 당초 목표인 1조9539억원을 초과 달성한 2조743억원에 이르러 창사 이래 처음으로 매출 2조원 시대를 열었다.

이때 발전설비 부문에서 울진, 영광, 당진, 삼천포, 하동 등 원자력·화력 발전소 등에 주요 기자재 공급과 기전설치공사를 수행했으며, 산업설비 부문에서는 사우디 쇼아이바 담수, 인도네시아 누산타라 시멘트공장 등 산업플랜트 주요설비를 제작·공급한 것이 매출에 날개를 달아줬다. 1995년 3월 26일 출하식이 열린 울진 3호기 원자로는 한국 표준형 원전으로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 15일에는 700㎿급 중수로형 원자로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한국중공업은 중수로형과 경수로형, 양대 노형의 원자로를 동시에 생산하는 세계적인 발전설비 제작업체로 부상하게 됐다.

1991년 당시 한국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의 국산 원자로 개발 성공 기념식 모습./경남신문DB/
1991년 당시 한국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의 국산 원자로 개발 성공 기념식 모습./경남신문DB/

◇민영화… 두산 품으로= 1990년대 후반 한국중공업은 다시 위기를 맞이한다. 발전설비 일원화 조치가 해제돼 대기업들이 발전설비 시장에 뛰어들며 기업 간 경쟁이 심화됐다. 한국중공업 가동률은 급격히 떨어지고, 1980년대 후반에도 있었던 민영화 불씨가 재점화됐다. 여기에 외환위기가 더해진 것이 민영화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00년 두산에너빌리티(당시 두산중공업) 창원공장 전경./두산에너빌리티/
2000년 두산에너빌리티(당시 두산중공업) 창원공장 전경./두산에너빌리티/

2000년 12월 12일 두산컨소시엄은 3057억원으로 한국중공업의 최종 낙찰자가 됐다. 2001년 3월 23일 두산중공업으로 사명이 정해졌다. 두산중공업은 해외 발전 EPC사업을 추진해 중동, 인도, 동남아 등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잇달아 수주하며 2004년 단기간에 턴어라운드에 성공했다. 2004년 두산중공업 수주액은 4조100억원으로 창사 이래 최대였고 매출은 2조4555억원, 영업이익은 2076억원이었다. 이때 해외 수주 1조원을 달성해 두산중공업은 기념 축제를 열고 생맥주 420만㏄ 등을 제공, 4000여명이 동시에 식사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두산중공업은 세계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2010년 다시 한번 해외 수주 전성기를 맞았다. 2010년에는 해외 자회사 연결 기준으로 13조원이 넘는 사상 최대 수주실적을 달성했고, 2011년에도 10조원 이상 수주는 이어졌다. 사우디아라비아 라빅 화력발전소, 라스아주르 해수담수화 플랜트, 인도 라이푸르 석탄화력발전소, 베트남 몽중 석탄화력발전소 등 핵심 시장인 중동, 인도, 동남아시아에서 초대형 프로젝트를 잇따라 수주한 데 이어 아랍에미리트 원전 주기기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WinDS3000 풍력시스템 또한 첫 수주에 성공하는 등 각 분야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작년 5월 두산에너빌리티 창원본사 단조공장에서 열린 ‘신한울 3·4 주기기 제작 착수식’ 모습./경남신문DB/
작년 5월 두산에너빌리티 창원본사 단조공장에서 열린 ‘신한울 3·4 주기기 제작 착수식’ 모습./경남신문DB/

◇두산에너빌리티로 재도약= 두산중공업은 2010년 중후반 들어 또다시 위기를 겪는다. 세계적 탈탄소 추세로 석탄화력발전 신규 발주가 감소했고, 자회사의 위기도 더해졌다. 여기에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두산중공업 위기의 결정타가 됐다. 2011~2020년 사이에는 4개년을 제외하고 모두 당기순손실을, 2020년은 이 기간 중 가장 큰 8384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두산중공업은 2020년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쳤고, 2022년 두산에너빌리티로 사명을 변경해 재도약에 나섰다. 윤석열 정부는 대대적인 원전 지원책을 가동했고, 두산에너빌리티는 가스터빈, 수소, 해상풍력, 소형모듈원전(SMR) 등을 주요 성장 모델로 삼아 강도 높은 체질 개선을 추진했다. 특히 친환경 신규사업에 적극 투자하고 있어 2022년 기준 친환경 사업 수주실적은 전체 수주 대비 73%를 달성했고 2027년까지 이 비중을 82% 이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에 힘입어 두산에너빌리티는 지난해 연결기준 매출 17조5899억원, 영업이익 1조4673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각각 14.1%, 영업이익은 32.7% 늘어나며 부활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지원 두산에너빌리티 대표이사 회장은 2023 통합보고서를 통해 “친환경 에너지 중심의 사업 포트폴리오 전환은 여러 분야에서 성과가 나타나고 있고 수주 또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며 “고수익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고 연구개발 투자를 신사업에 집중해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이 기사는 한국산업단지공단 경남지역본부 협조를 받았습니다.

조규홍 기자 h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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