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김홍섭의 좌충우돌 문화유산 읽기] (6) 경상남도 기념물 하동 백련리 도요지

막사발에 담긴 조선의 혼, 일본의 혼을 빼다

기사입력 : 2024-06-20 21:33:05

통일신라·조선시대 가마터서 만든 대접·사발 등에 반해
조선 도공 끌고 간 일본, ‘정호다완’ 등 막사발 국보 지정

정웅기 도예가, 백련리서 40년째 막사발과 도자기 재현
가마터 지키며 도자기 우수성 알리는 체험교실도 열어


하동 백련리 도요지는 터는 남아 있지만 지금은 거의 실체를 찾기 어렵다. 신라와 조선의 가마터 4기가 있었다는데, 1기만 재현되었고 뒷산에 있는 3기는 거의 폐허에 가까워 본래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필자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점잖치 못한 또 다른 맨얼굴을 직시할 수 있었다. 조선의 문화를 배워간 것이 아니라 탈취해간 그 현장에서 역사를 돌아본다.

하동요전시관.
하동요전시관.



◇조선막사발에 비친 일본의 맨 얼굴

도요지는 자기나 기와, 그릇들을 만들어 굽던 가마터다. 하동 백련리 도요지는 통일신라시대와 조선시대에 토기와 자기를 굽던 가마터로, 현재의 사기아름마을에 있다. 입구에는 커다란 다완 조형물이 상징처럼 서 있다. 좁은 시골길을 얼마 들어가지 않아 차를 세운다. 정웅기 도예가가 기다리고 서 있다. 그 옆에는 대형가마다. 가마 옆에 장작이 잔뜩 쌓여 있다. 정웅기 도예가가 설명해준다. 이곳은 전통가마를 재현한 것이고, 16~17세기 분청사기, 상감 백자, 철화 백자를 주로 구웠다. 출토되는 그릇의 종류는 대접, 접시, 사발, 병, 항아리, 잔 등으로 다양하다. 대부분이 생활용 자기였다. 이를 통해 백련리 가마터가 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그릇을 굽던 곳이라는 것이다.

하동 백련리 도요지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일본이 국보로 삼은 찻잔 정호다완(이도다완)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의 도자기 장인들을 납치하여 생산한 것임을 밝히는 데 중요한 유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과 일본의 도자기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백련리 사기마을과 마을 뒷산에 4개의 가마터가 있는데, 이 중 1개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이며, 나머지 3개는 분청사기와 백자를 굽던 조선시대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일본으로 도자기를 대거 가져갔던 일본군들이 전쟁이 끝나고 퇴군하면서 이곳 백련리의 가마를 파괴하고 도공들을 납치해 갔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가마터를 재현한 경남 기념물 ‘하동 백련리 도요지’.
조선시대 가마터를 재현한 경남 기념물 ‘하동 백련리 도요지’.
조선시대 가마터를 재현한 내부.
조선시대 가마터를 재현한 내부.

◇조선 도공을 몽땅 끌고오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한 군대에 명령을 내리는데, 내용이 조선의 기술자를 닥치는 대로 잡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로 해서 일본 땅에 끌려간 조선의 기술자 숫자는, 일본 측 문헌자료에는 2만~3만 명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조선의 자료에 따르면 그 수가 무려 10만~40만 명 정도로 나타난다. 지금도 2차대전 태평양전쟁에 끌려갔던 징용자 수나 위안부 숫자를 터무니없이 축소하려 드는 일본의 근성을 보면 그들의 기록은 믿기 어렵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사가번주(佐賀藩主)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武·1538~1618)에게 보낸 주인장(朱印狀·해외통상을 허가하는 공문서)에는 이런 기록이 적혀 있다. “조선인 포로 중 세공을 하는 자와 손재주가 있는 자는 여자라도 일을 시킬 수 있게 상부로 보내줄 것이다.”

이 명령에 따라 나베시마는 1593년과 1598년(선조 31년) 2차례에 걸쳐 도자기를 만드는 사기장(沙器匠)뿐만 아니라 봉제공, 잡화공은 말할 것도 없고 대장장이까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가진 자라면 닥치는 대로 잡아서 끌고간 것이다. 그중에서도 당시 일본이 특별히 관심을 갖던 기술자는 사기장, 즉 도공이었다. 도요토미는 또 임진왜란이 소강상태로 빠진 1595년(선조 28년) 6월 잠시 귀국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1535~1619)에게 직접 차를 따라주고 차 도구도 하사하면서 따로 조선인 도공의 납치를 지시했다고 한다.

◇조선 숭늉그릇, 일본 국보 되다

일본의 국보가 된 조선의 기자에몬 이도(喜左衛門 井戶) 같은 막사발은 경남 진주지방에서 제삿날 김치를 담는 그릇이었다고 한다, 일반백성들의 가정에서 흔히 사용하는 그릇이었다. 김치는 물론 밥도 담고 반찬도 담고 숭늉도 담고 때로는 모를 심다가 새참 때 막걸리 사발로도 사용하는, 글자 그대로 ‘막사발’이었다. 이 조선 막사발 ‘기자에몬 이도’가 소장자 가자에몬 이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는데 1781년 다도구 수집가이자 마츠에(松江)의 영주였던 마츠다이라 후마이(松平不昧)가 구입할 때는 금 550냥을 지불했다고 한다. 요즘 금 한 냥이 약 40만원 한다니 550냥이면 대충 계산해도 어마어마하다. 생각만 해도 조선 숭늉그릇 만세다. 실제로 당시 일본에서는 이도다완 하나의 가격이 성 한 채의 값과 맞먹는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그 정도는 아니고 성은 성인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규모 성이 아니라 군사시설로서의 작은 성채 정도로 보면 될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 이상이라는 설도 있다.

노부나가의 아들 오다 노부타와와 일전을 벌이던 마츠나가 히사히데 부자는 오다 가문의 공격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시기산 성을 자신의 손으로 불태워버리고 자결했다고 한다. 여기에 다른 이야기도 하나 붙는다. 오다가 차솥과 다완을 내놓으면 살려주겠다고 하자 그렇잖아도 패전으로 자존심에 스크래치 간 상황인데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내어놓으라니 가랑이 사이로 기어나가라는 모욕감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분기탱천한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다도구와 함께 폭사했다고 한다. 조선 숭늉그릇 정도면 일본 장수가 목숨을 걸 수도 있다니 한국인 자존심 기름칠 좀 해도 되겠다. 요즘도 이천 도자기축제 때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우르르 몰려와 이도다완을 쓸어가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백련리 가마터 사기마을 입구의 다완 조형물.
백련리 가마터 사기마을 입구의 다완 조형물.

◇일본은 왜 조선막사발에 열광하나

일본인들은 8세기 이후 말차(抹茶·분말차) 마시는 법과 문화를 발전시켰다. 말차를 다도의 범주로 끌어올리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말차 전용 사발, 즉 찻사발(다완·茶碗)이었다. 이후 12세기 말 중국 혹은 고려에서 수입한 고급 자기그릇 등을 카라모노(唐物)라 부르며 다완과 찻그릇으로 사용하였는데 워낙 비싸다 보니 차 문화가 사치스러워졌다.

전국시대에 사치에 대한 반발로 소박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와비문화’가 다도 문화에 접목되면서 조선에서 만든 이도다완, 즉 막사발의 거칠고 소박한 아름다움에 눈을 뜬 것이다. 대부분의 이도다완은 흙의 성분 분석결과 경상도 남해안과 동해안에서 일본 상인들의 주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조선의 경남 진주에서 제작된 쯔쯔이쯔쯔이도(筒井筒井井戶)라는 사발이 있는데, 일본인들은 이 사발의 첫 소장자인 ‘정호약협수(井戶若狹守)’의 이름인 이도(정호井戶)를 따서 조선 막사발을 ‘이도다완’으로 통칭했다.

정웅기 도예가가 재현한 정호다완.
정웅기 도예가가 재현한 정호다완.

◇이도(정호井?)다완

다완의 왕으로 불린다. 무로마치시대까지는 중국의 텐모쿠다완이 최고였으나 전국시대와 모모야마시대까지는 이도다완이 일본 다도를 지배했다. 대표적 다완으로 사발 형태로 되어 있으며 역삼각형 모양 덕분에 손에 안정적으로 잡히며 다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 밑부분은 유약들이 뭉쳐 오돌토돌하게 되어 있는데 이 부분 때문에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일본도의 손잡이와 비슷한 감촉이라 매우 선호했다고 한다. 물에 담가두면 옹달샘에 담가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국보로 선정된 것도 있고 다완의 왕으로 칭송되면서 가장 귀하게 치는 그릇이다. 현재는 한국 경남 해안의 흙을 사용해서 구우며 이도(井?)의 약속이라는 부르는 비파색 표면, 죽절굽, 매화피(카이라기), 반시계방향 물레방향을 지키는 것만 이도다완이라고 부른다고 정웅기 도예가는 설명한다. 그리고 다완의 크기나 색감은 필요와 환경에 따라, 그리고 도예가의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조금씩 달라진다고 한다.

정웅기 도예가가 전통 정호다완을 재현하고 있다.
정웅기 도예가가 전통 정호다완을 재현하고 있다.

◇정웅기 도예가 40년째 막사발 재현

불과 24세의 나이에 백련리에 들어왔다가 조선 막사발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아예 백련리에 터를 잡고 주저앉은 사람, 정웅기 도예가다. 이곳에서 조선 막사발과 달항아리 등 조선 도자기를 재현하고 있는 세월만 벌써 40년째다. 젊어서는 전국을 돌며 가마터를 조사했다고 한다. 이곳 백련리에 들렀을 때 질 좋은 흙과 유약의 재료로 쓰이는 석회석, 재, 작은 돌 등이 풍부한 것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련리 도요지의 역사성과 전통 막사발의 거칠면서도 신비한 빛깔과 세련된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는 것이다. 막사발에 대해서 설명할 때면 눈빛이 빛났다.

“자연에 순응하여 솔직하면서도 의도적이지 않은 아름다움이 눈에 띄는 찻사발은 조선시대 밥그릇, 국그릇, 찬그릇, 숭늉그릇, 막걸리잔 등 서민의 삶과 일생을 같이 한 위대한 유산”이라고 말하는 그의 손에선 방금 재현해낸 이도다완이 다소 거친 듯 그러나 우아한 모습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한때 백련리 사기마을에는 다수의 도예가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약간 정체된 상태다. 그 와중에도 정웅기 도예가는 파수꾼처럼 전통 가마터를 지키며 묵묵히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도자기의 우수성을 알리고 보급하기 위해 작업실을 개방하여 체험교실도 열고 후진을 양성하는 중이다.

Tip

△하동 백련리 도요지: 도요지가 위치한 하동군 진교면 백련리 사기마을은 1984년부터 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전통 향요를 재현하고 있으며, 현재도 요업(窯業)이 성행하고 있다. 1994년 지역 문화의 전통과 맥을 잇는 시범 문화 마을로 지정되었다.

△와비문화: ‘와비 사비(일본어: わび·さび(侘·寂)’란 일본의 문화적 전통 미적관념의 하나다. 사치스럽고 고급한 것을 지향하는 문화에 염증을 일으킨 일본인들은 작고 소박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기 시작했다. 이는 다도에서 시작해 다양한 장르에 영향을 미쳤다. 작지만 잘 꾸며진 일본의 전통 정원이나 분재도 와비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김홍섭(소설가)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