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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마산방어전투의 해결사 김성은 해병대- 홍근표(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기사입력 : 2024-06-11 19:16:27

1950년 7월 31일 인민군 6사단에 의하여 진주가 함락되고 아군은 마산 방면으로 후퇴한다. 마산이 적군의 손에 넘어갈 극도의 위기에 처하자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경북 상주에 있던 미 25사단 병력을 급히 마산으로 이동시켜 마산을 지키게 된다. 창녕~포항에 이르는 낙동강 북부지역을 아무리 지켜낸다 하더라도 마산이 뚫리면 임시수도 부산의 위기도 불 보듯 뻔하였기 때문이다.

김성은 해병대대도 군북으로 후퇴하였다가 마산 성호초등학교로 와서 하룻밤을 보내고 8월 2일 서북산 너머의 함안군 여항면(지금의 진전면) 고사리 산서 지서에 지휘본부를 설치하였다. 인민군 6사단이 진주에서 마산으로 오는 길목인 발산재(지금의 진주시와 마산합포구의 경계지점)를 초점으로 금암리 334고지(지금의 진전면 양촌리 뒷산)와 고사리 428고지(발산재 입구의 산 봉우리)에 각각 1개 중대를 배치하였다가 새벽 4시경 진주에서 마산으로 이동하던 인민군을 기습하여 큰 전과를 올린다. 후퇴만 거듭하던 아군으로는 그때까지 가장 큰 전과라 할 수 있다. 이름하여 고사리 전투이다.

이후 김성은 해병대는 위기 때마다 긴급 투입되어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8월 7일 인민군에게 태봉의 304고지(지금의 태봉병원 앞산)를 빼앗겨 마산 진동 간의 보급로가 차단되었을 때 약 두 시간 반 만에 보급로를 확보하였다.(이 공로로 전 장병 일 계급 특진을 하게 되었고 김성은 중령도 대령이 되었다.)

8월 7일부터 미군이 고전을 면치 못한 진동 주변의 야산들을 8월 10일 아침부터 다음날 오후까지 싸워 회복하였고 다음에는 곧바로 12일 군북의 오봉산 인민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성공리에 이행하였다. 그리고는 16일 통영으로 출발하여 17일 아침 우리나라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을 성공함으로써 ‘귀신 잡는 해병대’의 이름도 얻는다. 이 작전으로 거제도를 지키고 거제도의 수많은 피난민을 살렸다.

김성은 해병대장은 마산 지구의 전투에서 불굴의 호국정신으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전설적인 인물이지만 그의 행적은 전설이 아니라 역사이다. 지금의 해병대에도 그 정신이 살아 혈맥을 타고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김성은 해병대장은 창원시 가음정동 출신이며 창원상남초등학교 12회 졸업생이다.

홍근표(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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