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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명인] (16) 통영 갓일 입자장 보유자 정춘모

운명처럼 만난 ‘갓일’… 60년 ‘갓생’을 살다

기사입력 : 2022-08-19 07:59:06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을 지칭할 때 최초 혹은 최후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최초는 그로부터 비롯되어 맥이 이어지는 경우를 의미하고, 최후는 이어져 오던 맥이 끊어지는 지점에서 안간힘으로 붙잡고 선, 벼랑 끝의 오직 한 사람을 일컫는다. 최후의 1인은 비장한 아름다움은 있으나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이 글에선 최후라는 말보다 ‘유일(唯一)’이란 말을 쓰고 싶다.

통영 갓일 입자장 정춘모씨가 갓을 만들고 있다./이달균 시인/
통영 갓일 입자장 정춘모씨가 갓을 만들고 있다./이달균 시인/

국가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입자장 보유자 정춘모(83)씨가 그런 인물 중 한 분이다. 전통의 맥을 붙잡은 ‘유일한 1인, 갓 장인’을 만난 곳은 통영한산대첩축제가 한창인 통영12공방 시연장이다. 8월 무더위 속에서 갓일에 열중하는 모습은 진지하다.

갓은 양반들의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양반들이 주로 쓴 흑립, 무관이 쓰던 전립, 천민들이 쓰는 패랭이 등 계층에 따라 종류도 많다. 조선조엔 누구든 갖춰야 할 의관의 하나였지만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이미 잊히어 가는 갓으로 한 생애를 산 사람. 소용되지 않는 물건을 만드는 씁쓸함은 모두가 공유하는 감정이지만, 그 유일한 선택으로 인해 아무도 느끼지 못한 보람과 긍지를 가진다면 행복의 가치는 무한하지 않을까.

통영12공방으로부터 비롯된 장인들의 공예품들은 대대손손 이어져 왔고, 지금도 한국전통문화의 중요 유산으로 대접받고 있는데, 통영갓 또한 이곳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명품 중 하나다. 조선조에선 여러 지역에서 갓을 만들었지만, 특히 통영에서 만든 갓은 ‘통영갓’으로 불릴 정도로 그 우수성은 탁월했다. 임금의 어립(御笠)으로 진상되었고, 고관대작의 선물용으로도 으뜸이었다.

통영 갓일 입자장 정춘모씨가 갓을 만들고 있다./이달균 시인/
통영 갓일 입자장 정춘모씨가 갓을 만들고 있다./이달균 시인/

‘갓일’은 말 그대로 갓 만드는 일을 뜻한다. 갓일은 그야말로 머리카락 홈파는 일과 비견된다. 갓 하나가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공정이 있지만 크게 보아 양태(凉太)작업, 총모자(總帽子)작업, 입자(笠子)작업 등 3가지 작업으로 나눠진다.

양태작업은 갓의 태를 엮는 작업인데 죽사(竹絲)를 네 가닥으로 엇갈려 꼬아 만드는 과정으로 갓일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다. 이 대나무실을 만들려면 먼저 삶은 대나무를 종이처럼 얇게 만들어 피죽 끝부분에 금을 내어 설주판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문지르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만든 죽사를 서로 꼬이지 않게 가닥가닥 빗은 후, 끝이 고리처럼 휘어진 바늘을 이용해 대나무실을 대각선으로 엮는다. 이렇게 죽사를 엮고 나면 둥근 틀 위에 올려 인두로 지지면서 완만한 곡선을 만드는데, 이 과정을 ‘트집 잡기’라고 한다. 이 트집 잡기가 끝나면 양태에 명주 천을 씌우고 인두로 지져 고정한 뒤 다시 먹칠을 반복하는 이 과정은 절정의 인내를 요한다.

양태작업을 하고 있는 부인 도국희씨.
양태작업을 하고 있는 부인 도국희씨.

그렇다고 총모자 작업이 그리 수월한 것도 아니다. 먼저 둥근 원통 틀에 죽사를 이어 붙여 모양을 잡고, 말총을 한 올 한 올 붙여준다. 말총을 쓰는 이유는 내구성과 탄성이 좋아 땀이나 기름때에 잘 오염되지 않고 촉감이 부드러워 즐겨 쓴다. 여기에 네 쪽 무늬의 천을 붙여 먹칠을 하고, 못태를 이어 붙이는 지난한 과정이 수반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양태와 총모자를 겹쳐서 하나로 합치는 과정이 입자작업이다. 양태 구멍에 총모자를 넣는데 다 넣지 않고 갓끈 구멍 뚫을 부분을 남겨두고, 알맞은 위치를 맞춘 채 인두로 고정한다. 마지막으로 그 양쪽 구멍에 끈을 달면 갓 하나가 완성된다.

통영 갓일 입자장 정춘모씨와 양태 우수이수자 도국희씨 부부.
통영 갓일 입자장 정춘모씨와 양태 우수이수자 도국희씨 부부.

이렇듯 양태작업은 24개 과정, 총모자작업은 17개 과정, 입자작업은 10개 과정 등 도합 51개 과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갓 한 개를 만드는데 대략 5~6개월이 소요된다. 돈깨나 있는 이들의 애용품이던 진사립은 한 개 만드는데 일 년 가까이 걸린다고 하니 갓 장인의 공력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예전에는 이 세 공정을 3명이 분업하여 제작하였는데 현재는 혼자서 이 일을 다 소화해 낸다.

60년대엔 아직 산업사회가 도래하기 전이었으니 간간이 갓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갓일로 먹고 사는 장인들이 꽤나 있었다. 1958년 무렵의 김천, 무엇에 씌었는지, 하고 많은 일 중에서 이 일이 눈에 밟혔다. 결국, 운명이라 여기고 낮에는 갓일을 배우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하기에 이른다. 하루 15시간, 청소년기를 고스란히 그렇게 보냈다.

입자장 도구들.
입자장 도구들.
입자장 도구들.
입자장 도구들.
입자장 도구들.
입자장 도구들.

25세가 되던 해, 어엿한 기술자가 된 그는 4년 동안 번 돈과 스승들의 지원을 밑천 삼아 대구에서 ‘입자공업사’라는 공방을 차렸다. 처음엔 꽤 쏠쏠했지만 결국 갓일은 생업이 되지 못했다. 70년대 산업사회가 시작되면서 시대와는 맞지 않는 일이 되어버렸다. 생을 걸까, 종지부를 찍을까 하는 질문과 회의로 밤을 지새운 날들이었다. 모른 척 돌아서서 다른 생업의 길을 가야 하나, 아니면 애써 배우고 가꿔온 소중한 문화유산이니 나 혼자만이라도 그 끈을 붙들고 전통을 이어가야 하나, 그런 기로에서 운명의 길을 따르기로 했다.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도 갓일은 버릴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서울로 가 보석감정 기술을 배우기도 하고, 농장 운영을 해가며 이 일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1991년 5월, 국가로부터 국가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입자장(笠子匠)으로 지정되었다. 이 일에 투신한 지 33년 만이었다.

“갓은 나의 운명이지요. 쓰임새 없는 갓 만드는 일을 누가 하고 싶겠소? 나는 20대 초반, 대구에서 김봉주(입자장), 고재구(총모자장), 모만환(양태장) 세 분의 통영출신 국가무형문화재로부터 갓일을 배웠어요. 어쩌면 이 길은 스승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인지도 몰라요. 소용되지 않는다고 하여 내가 손을 놓아버리면 우리 전통 맥은 영영 사라질 것이니 고통 속에서 희열을 찾을 수밖에요. 이 고단한 작업을 젊은이들에게 권하는 건 염치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혼자라도 열심히 하여 혹시 내 일을 눈여겨보는 후인이 있으면 전수할 수도 있겠지요.”

극한의 섬세함으로 부단히 진력하는 갓일은 사명감 없이는 할 수 없다. ‘장인의 혼’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전통을 계승한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60년 세월을 이어왔으니 스스로 돌아봐도 후회 없는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행한 것은 부인 도국희(67)씨가 양태 우수이수자가 되었고, 아들 한수(37)씨가 입자 전승교육사가 되어 명맥을 잇고 있으니 한시름은 놓게 되었다.

이달균(시인)
이달균(시인)

이달균 (시인)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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