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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나공간] 마산 서점·위스키바 ‘화이트래빗’

마산 오동동 골목, 책과 술이 있는 ‘토끼굴’엔 문화가 반짝

기사입력 : 2023-12-19 21:23:38

고향 마산 돌아온 ‘귀향청년’ 에이든 대표
어릴 때 살던 집터 5년 기다려 입주해
2021년 1월 문화대안공간 화이트래빗 열어


거리마다 사람이 가득 차 아침이고 밤이고 활력이 넘쳐 났던 곳. IMF(외환위기)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마산 오동동은 경남 어느 곳보다 문화가 번성했다. 사람이 떠나간 지금은 거리마다 한적한 고요가 이어진다. 한때 번영했고 지금은 쇠락한, 그곳의 한 골목에서 희미하게 문화의 빛을 반짝거리는 토끼굴이 있다. 서점이기도, 위스키 바이기도 한 ‘화이트래빗’이다.

‘화이트래빗’은 토끼굴 같은 작은 곳에서 책을 읽을 수 있고 다양한 칵테일을 맛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화이트래빗’은 토끼굴 같은 작은 곳에서 책을 읽을 수 있고 다양한 칵테일을 맛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열평 남짓 작은 공간, 책장과 바로 꽉 차
고전해설집·인문서적 등 다양한 서적과
중후한 ‘클래식 칵테일’ 기묘한 조화 이뤄


◇책과 술의 기묘한 동거= 빛바랜 옛 간판 아래로 줄줄이 셔터를 내린 구불한 골목길. ‘화이트래빗’의 입구는 까만 철문 사이로 작고 기다란 창 하나만 빼꼼히 드러나 있다. 세련되고 모던한 디자인임에도 주변에 내려진 셔터들과 묘하게 어울려 자칫 찾지 못하고 지나치기 일쑤다.

안으로 들어서니 내부가 생각보다 좁다. 열 평 남짓한 작은 가게는 왼편에 위치한 책장과 오른편에 위치한 칵테일 바로 가득 채워져 있다. 책장의 서적은 모두 판매하는 것들이다. 새 책도 있고 헌책도 있다. 서적들은 시집과 고전해설집, 인문서적과 한국·외국소설, 글쓰기 등 주제에 맞춰 나란히 진열돼 있다.

수십 가지 주류를 담은 메뉴판은 단출하고 의도치 않은 구겨짐이 매력인 종이 더미다. 메뉴는 칵테일, 네그로니, 라스트 워드, 하이볼과 티키 등 주종별로 눈이 팽 돌 만큼 많다. 당연히 캡션처럼 붙은 설명으로 시선이 가는데, 칵테일 설명이 제멋대로다. ‘매드 해터(Mad Hatter: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모자 장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에이든(주인장의 활동명) 같습니다.’ 어디서 긁어온 것이 아닌, 정성 들여 쓴 캡션인 것은 분명하다. 들어보니 맛을 설명하려다가 불가능함을 느끼고 사족을 붙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단지 디자인 덕분인지, 화이트래빗이 형형색색의 가벼운 ‘디스코 칵테일’이 아닌 중후한 ‘클래식 칵테일’을 다루는 덕분인지 술과 책, 어울리지 않는 둘의 기묘한 동거가 이상하게도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그 조화 안에는 화이트래빗을 운영하는 김병철(39) 대표가 있다. 모두가 그를 활동명인 ‘에이든’으로 부르기에 여기서도 ‘에이든 대표’로 칭하겠다.

좌측에 책 읽는 공간이, 우측에 칵테일을 즐기는 공간이 있다.
좌측에 책 읽는 공간이, 우측에 칵테일을 즐기는 공간이 있다.

◇마산, 평온을 가장한 그 우울 속으로= 화이트래빗은 지난 2021년 1월 문을 열었다. 마산에서 태어난 에이든 대표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가 다시 돌아온 귀향청년이다.

에이든 대표는 서울에서 위스키와 클래식 칵테일을 즐기던 애주가였는데, 돌아온 당시 경남에 제대로 된 위스키와 클래식 칵테일을 파는 곳이 없었다. 그는 그때부터 막연하게 ‘내가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위치는 이곳으로 점찍어뒀다. 화이트래빗이 자리 잡은 이곳은 어릴 적 그가 살던 집터다. 공간이 빌 때까지 5년을 기다렸다. 문을 열었던 당시, 지금은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가 낮에는 서점으로 운영하고 밤에는 에이든 대표가 위스키바로 운영했다.

에이든 대표는 가게를 열면서 문화의 빛을 잃은 마산에서 ‘문화대안공간’ 역할을 해보겠다고 생각했다. 그 어느 때보다 활력 있었던 마산을 기억하던 그로서는, 고요하고 침체된 고향의 모습이 우울했다.

“창원으로 통합이 되고, 큰 공단과 회사가 들어서면서 자본을 잡은 창원이 중심이 되자 마산은 점점 축소됐어요. 찬란하던 과거를 기억하던 마산 사람이라면, 말은 안 하지만 어딘가 좌절이 있을 거예요. 저는 마산의 고요함이 ‘우울함을 가장한 평온’이라고 생각했죠.”

마산합포구 오동동 주택가 골목길에 있는 ‘화이트래빗’.
마산합포구 오동동 주택가 골목길에 있는 ‘화이트래빗’.


객원으로 문화기획단체 ‘너드긱프릭’ 결성
올해 플리마켓·작가 초청 북토크 등 진행
직접 굿즈도 제작… 내년엔 과학토크도


◇다시 주목 받는 마산을 위해= 마산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길 바란다. 아니, 사실 불가능에 가깝지만 적어도 ‘특색 있고 재밌는 도시’가 됐으면 했다. 그래서 그는 문화기획집단 ‘너드긱프릭(Nerdgeekfeeak)’을 만들었다. 정해진 멤버는 없고 지역을 사랑하는, 어느 분야에서 ‘덕후’에 오른 일반인 ‘객원’들로 이뤄진다.

너드긱프릭이 올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주제는 ‘우리가 남겨진 게 아니야♡’다.(하트가 중요하다고 한다) 우리는 ‘남겨진 것’이 아니라, 문화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에이든 대표는 “저변에 깔려 있는 문화적 소외감, 좌절감을 껴안고서 연속적인 문화기획을 통해 그것을 사랑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올해 지역에서 팬시한 업체들을 찾아 마산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플리마켓을 열기도 했고 장편소설 ‘달력 뒤에 쓴 유서’의 저자 민병훈 작가,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의 고명재 작가를 불러 북토크를 열기도 했다. 조만간 ‘재즈 덕후’와 함께 술을 마시며 재즈를 배우는 ‘재즈토크’를 진행하고, 1월에는 실제 물리강사를 초청해 ‘과학토크’를 할 예정이다. 지역 기반이되 지역에만 기반을 두지 않는, 소소하지만 재밌는 소식을 담는 ‘뉴스레터’도 기획하고 있다.

에이든 대표는 공간과 단체에 대한 아이덴티티를 위해 컵, 모자, 옷 등의 굿즈도 만들었다. 그는 “사람들이 이 공간을 재밌게 생각해주는 만큼, 우리의 정체성을 담아보고자 굿즈를 만들게 됐다”며 “굿즈 문화가 서울에는 흔하지만 경남에는 없어서, 앞으로도 다양한 공간에서 굿즈를 제작해 그 문화가 생겼으면 한다”고 얘기했다.

'화이트래빗'의 굿즈.
'화이트래빗'의 굿즈.
'화이트래빗'의 굿즈.
'화이트래빗'의 굿즈.

[인터뷰] 김병철 대표

“스윙나이트 같은 신나는 공간 꾸며 ‘재밌는 마산’ 꿈꿔요”

김병철 화이트래빗 대표./김승권 기자/
김병철 화이트래빗 대표./김승권 기자/

Q. 화이트래빗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된 건지?

화이트래빗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나오는 토끼다. 내가 참 좋아하는 책이라 거기에서 착안했다. 토끼가 앨리스를 데리고 토끼굴로 들어갔더니 ‘원더랜드’가 된 것처럼, 새로운 경험을 시작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물론 작은 공간이라 ‘토끼굴 같다’고 생각해 ‘토끼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Q. 유동인구가 거의 없는 골목인데 손님들이 어떻게 찾아오는지?

대부분 SNS나 입소문으로 찾아오시는 것 같다. 전문적인 위스키나 클래식 칵테일을 좋아하는 분들도 많이 온다. 위치가 좋거나 하진 않지만 그래도 찾아주시는 분들이 참 고맙다.

Q. 마산에서 언제까지 있었는지 옛 추억을 얘기해보자면.

고등학교까지 나오고 대학을 서울로 갔다. 사실 어릴 때 집 밖으로 나가면 사람들이 참 많았다. 가게 위쪽 하천이 있는 위치에 상가가 있었는데 여러 잡화점이랑 꼭대기에 롤러장과 트램펄린이 있어서 자주 다녔다. 오프라인 음반 판매점인 ‘길벗레코드’도 들르고 집에 오는 길에는 서점인 ‘학문당’을 들어갔다. 그때 이 정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도시는 이곳밖에 없었다.

Q. 가게를 확장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옆 가게도 비어 있어서 그곳까지 사서 벽을 뚫어 연결하고 공간을 넓히려고 한다. 그러면 더 큰 기획도 할 수 있다. 창원에 스윙댄스 추는 곳이 없어서 ‘춤꾼’들이 부산·울산으로 가더라. 술 마시면서 춤추는 스윙나이트 같은 공간도 마련해보고 싶다.

글= 어태희 기자·사진= 김승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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