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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1018) 명세수도(命世守道)

- 하늘의 명으로 세상에 태어나 도를 지키다

기사입력 : 2024-02-27 08:09:27
동방한학연구원장

퇴계(退溪) 이황(李滉 : 1501~1570) 선생은 아주 온화하고 겸허(謙虛)했지만, 학문상에 있어서는 아주 엄격했다. 역대 선배 학자들 가운데서 진정하게 학문하는 학자로 인정한 분이 없을 정도였다.

학문적으로 가장 인정한 제자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 1527~1572) 선생이라 할 수 있다. 1558년 서울에서 고봉을 처음 만났다. 얼마나 인정했으면 26세의 나이 차이에도 고봉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오(1558)년에 서울에 들어간 걸음은 뜻대로 안 되었지만, 그래도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우리 명언(明彦 : 高峯의 자)을 만나 본 것 때문이오.”라고 했을 정도였다.

두 선생의 기질은 완전히 달랐다. 퇴계선생은 수렴(收斂)하고 겸퇴(謙退)하신데 비하여, 고봉은 우뚝하고 굳세었다. 사는 곳도 예안(禮安)과 광주(光州)는 1000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관직도 공조참판(工曹參判)과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라는 큰 격차가 있었다. 그런데도 두 선생은 만나기 전에 학문에 대한 생각이 꼭 같았다. 주자(朱子) 학문의 위대성과 중요성을 공통으로 인식하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정독하고서, 퇴계선생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고봉은 주자문록(朱子文錄)이라는 축약본을 만들어 주자학 입문서를 만들었다.

퇴계선생은 고봉을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우리나라의 끊어진 학통(學統)을 이을 수 있는 일을 맡는 것도 안 될 것이 없겠소.”라고 했다.

고봉이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오자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명종(明宗)을 등에 업은 간신 이량(李樑)을 축출당하게 만들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유배생활하던 뛰어난 인재 소재(齋) 노수신(盧守愼),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등을 다시 조정에 돌아오도록 만들었다.

퇴계선생은 고봉의 학문뿐만 아니라 그 문장도 인정하여 ‘회재선생신도비명(晦齋先生神道碑銘)’ 등을 고봉에게 짓게 했고, 선생 부친의 묘갈명(墓碣銘)도 짓게 했다.

고봉을 모신 서원인 월봉서원(月峯書院)이 광주에 있다. 작년 2023년부터 도산서원(陶山書院)과 공동으로 강독회(講讀會)를 여는데, 올해도 2월 23일부터 1박 2일에 걸쳐 진지하게 열렸다. 전남대학교 호남학과 김경호(金璟鎬) 교수를 비롯한 여러 교수와 대학원생, 월봉서원 유림, 고봉선생 후손 등이 참석했고, 도산서원에서는 김병일(金炳日) 원장과 유림, 참공부 회원인 이광호(李光虎) 교수 등 여러 학자들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마침 김병일 원장이 두 서원 원장을 아울러 맡고 있어, 두 서원 간의 협조가 더욱 긴밀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학술사상 가장 진지하게, 가장 오랫동안 스승과 제자 사이에 사단칠정은 물론이고, 수신, 처세, 학문 등에 관한 토론이, 두 선생 사이에 전개되었다. 이런 학문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정신을 이어받은 도산서원과 월봉서원 간의 강독회는 영원히 지속되어 우리나라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

*命 : 명령할 명. *世 : 인간 세.

*守 : 지킬 수. * 道 : 길 도.

허권수 동방한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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