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위한 헌신, 경남 참전 영웅을 찾아서] (21) ‘군인이 꿈이었던’ 김임돈씨

영장 없이 입대… 전장을 누빈 당찬 소년

기사입력 : 2024-10-23 20:08:23

통영서 국민학교 졸업
어부 일하며 군인 꿈꿔
전쟁 터지자 자원 입대

부산서 2주간 통신 교육
격전지 다부동 전투 투입
통신병이지만 적과 싸워
폭격에 손등 부상입기도

휴전 되고 의가사 제대
학생들 안보 교육 나서
“나라 지켜낸 유공자들
잊지 말고 기억해주길”


최근 찾은 통영시 산양읍 김임돈(95) 6·25전쟁 참전유공자 자택. 그가 사는 마을에 들어서자 김씨는 지팡이를 짚고 도로에 나와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그는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했다. “사람이 그리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임돈 6·25 참전유공자가 통영시 산양읍 자택 앞에서 취재진을 맞이하고 있다.
김임돈 6·25 참전유공자가 통영시 산양읍 자택 앞에서 취재진을 맞이하고 있다.

군인이 꿈이었던 그는 전쟁이 나자 앞장서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모병관이 몸집이 작으니 집에 가라고 했지만, 밤새 징병장을 지켜 입대한 김임돈씨.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애국심 때문이었을까. 그에게 물어보니 “젊었을 때 기억이 났는데 이제 생각도 잘 안 난다”고 멋쩍게 웃었다.

언제 어디서 싸웠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전선을 누볐던 그가 현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임돈 6·25 참전유공자가 1950년 9월 참전한 다부동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김임돈 6·25 참전유공자가 1950년 9월 참전한 다부동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제발 입대시켜주십시오”= 통영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웠던 가정 환경 때문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멸치잡이 배를 탔다. 어부가 천직인 줄 알았던 그가 1947년 국방경비대(육군의 전신)의 한 대원을 만난다. 대원은 긴 총에 태극기를 달고 떳떳하게 걷고 있었는데 그는 그날로 군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로부터 3년 뒤 6·25전쟁이 발발한다. 동네 곳곳에 “김일성이 내려오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을 일으켰다더라” 등 소문만 있었지 구체적인 정보는 없었다. 그도 이 같은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전쟁이 아닌 작은 전투 정도 벌어진 줄 알았다.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내려오자 통영에서도 젊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징집이 시작됐다. 당시 그는 독자이기에 군 면제 대상이었지만, 자진해 입대하겠다고 나섰다. 한편으로는 꿈이었던 군인이 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입대 영장을 받지 않았지만 그는 징병장이었던 유영국민학교를 찾았다. 학교 정문 앞 군인들이 영장이 없는 이들은 출입이 불가능하다며 그를 막아섰다. 그는 힘을 써 억지로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운동장 안에는 영장을 받은 청년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 호명을 받고 한명 한명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이 되자 영장이 없는 그만 운동장에 남았다. 모병관이 “키도 작은 놈이 여긴 왜 왔냐?”고 물으니 그는 “나라 지키러 왔다”고 당돌하게 답했다.

모병관은 그에게 M1 소총을 메게 했는데 키가 작아 개머리판이 땅에 닿았다. 그는 그래도 입대를 고집하며 밤새 운동장에 앉아 있었다. 모병관이 그 모습을 보고 감동해 입대하게끔 도와줬다.

“부모님이 군에 가지 말라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지. 여동생 하나만 있으니 면제 대상인데 왜 죽으러 가냐고 다그쳤어. 하마터면 입대도 못 하고 집에 갈 뻔했지만, 다행히 군인이 될 수 있었지. 슬퍼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라 지키러 군에 간 거니 당당한 청년들도 많았어.”

초·중학생들에게 6·25전쟁 바로 알기 교육을 마친 후 학생들이 김임돈 6·25 참전유공자 목에 걸어준 태극기가 자택 거실에 걸려 있다.
초·중학생들에게 6·25전쟁 바로 알기 교육을 마친 후 학생들이 김임돈 6·25 참전유공자 목에 걸어준 태극기가 자택 거실에 걸려 있다.

◇최대 격전지, 다부동 전투= 그는 통영에서 마산까지 배를 타고 간 뒤 기차로 갈아타 어딘지 모를 훈련장에 도착했다. 교관들은 훈련병들에게 목총 한 자루씩 주고 산에 뛰어 올라가게 했다. 훈련은 그게 전부였다.

하루 남짓 훈련이 끝나고 그는 통신병으로 차출돼 부산의 통신학교로 갔다. 그는 이곳에서 2주 동안 통신선 가설, 암호 등을 교육받고 육군 직할 71통신가설대대 소속으로 다부동 전투에 투입됐다.

1950년 9월 인민군이 Y선(왜관-다부동-영천-기계-포항)을 목표로 공세를 이어갔다. 인민군은 먼저 X선(왜관-남지-마산)을 공격하며 국군과 유엔군의 관심을 돌렸다. 그 뒤 왜관·다부동, 신령·영천, 안강·포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며 낙동강 방어선은 붕괴할 위기에 처한다. 당시 인민군은 낙동강에 모인 국군과 유엔군을 대구와 영천에서 포위해 최종 목표인 부산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미군과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서도 다부동에서 꼭 승리해야 했다. 인민군도 대구를 빼앗아야 부산을 점령할 수 있었기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다.

특히 9월 5일은 미군에게 ‘악몽의 날’로 기록된다. 그날 하루 미군은 전사 및 행방불명 724명, 전상 521명 등 1245명의 인원 손실이 발생했다. 제8군사령부는 낙동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데이비드슨 선(진해-밀양-울산)’으로 철수할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전투가 길어지자 인민군도 동력이 떨어지고, 미 공군 폭격이 시작되면서 피해도 커졌다. 그 결과 9월 중순 인민군 공세가 줄어들고 방어작전이 성공하면서 대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는 전투 초반에는 통신병인지라 폭격으로 파손된 통신선을 수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병과에 상관없이 모두 총을 들고 싸워야 했다.

그도 고지 위 참호에서 인민군과 전투 중 포탄이 날아와 왼쪽 손에 파편을 맞았다. “사령부에서 대구를 뺏기면 대한민국이 공산화된다고 했어. 모두 죽도록 싸우라는 명령이 떨어졌지. 고지 위에 전투 중 폭격을 맞았는데 처음에는 손목 잘리겠다고 생각했지. 다행히 크게는 안 다쳤는데 옆에 후임은 그 자리에서 전사했어.”

김임돈 6·25 참전유공자가 전투 중 포탄 파편에 맞아 부상당한 왼쪽 손등을 가리키고 있다.
김임돈 6·25 참전유공자가 전투 중 포탄 파편에 맞아 부상당한 왼쪽 손등을 가리키고 있다.

대구 방어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그도 북진해 11월 평양까지 갔다. 그가 본 평양은 폭격으로 제대로 된 건물이 없을 정도로 폐허였다. 그때까지 그는 곧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다. 곧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고 다들 집에 갈 수 있다고 병사들은 믿었다.

믿음은 중공군 개입으로 산산조각이 났고, 그도 후방으로 후퇴했다. 그는 전선이 교착되면서부터 전투가 벌어지는 곳곳에서 통신선을 수리하고 구축하는 임무를 해나갔다. 폭격으로 통신선이 파손된 곳도 많았고, 일부러 인민군이 선을 끊기도 했다. 어느 날 중부 전선에서 통신선을 수리하려고 출동했는데 매복한 인민군 공격을 받았다. 빗발치던 적의 총알에 옆에 있던 전우가 맞아 전사했다.

“정말 힘들었지. 통신선 구축하랴, 총들고 인민군과 싸우랴. 바로 옆의 전우가 몇 번이나 죽어 나갔어. 살아서 돌아왔다는 게 신기할 정도야.”

김임돈 6·25 참전유공자가 1950년 9월 참전한 다부동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임돈 6·25 참전유공자가 1950년 9월 참전한 다부동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평화 지키기 위해 안보 교육 나서= 휴전 후 그는 1954년도 7월에 의가사 제대했다. 당시에는 집안 형편이 좋지 않으면 의가사 제대를 시켜주기도 했다. 고향인 통영으로 돌아온 그는 어부로 일하며 4남 3녀를 키웠다. 은퇴 이후에는 6·25전쟁 참전유공자회 통영지회 부회장을 맡으며 안보 교육에도 나서고 있다.

그는 벽에 걸린 태극기를 가리키며 학생들과 일화를 소개했다. “몇 년 전 초등학생, 중학생들에게 6·25전쟁 바로 알기 교육을 했을 때 학생들이 내 목에 저 태극기를 묶어줬어. 그러면서 ‘할아버지 감사합니다’라고 하더군. 그날 너무 감명 깊었어. 내가 고생해서 이 아이들이 좋은 나라에 잘 살고 있구나.”

태극기 옆에는 지난해 찍은 참전유공자회 통영지회 회원들의 단체 사진이 걸려 있다. 그는 사진 속 15명 중 3명이 이미 사망했고, 대다수가 몸이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진 속 전우들 얼굴을 만지며 마지막 부탁을 했다. “유공자들 덕분에 지금 세대들이 좋은 밥 먹고, 좋은 옷 입고 자유롭게 해외여행 다니고 있다고 생각해. 전우들끼리 모이면 목숨 걸고 나라 지켰는데 왜 욕을 먹어야 하냐고 한탄하는데, 마음이 참 아파. 이제 나이 들어서 지원도 필요 없고, 우리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줬으면 해.” 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지팡이를 짚고 나와 취재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김임돈 6·25 참전유공자가 통영시 산양읍 자택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취재진에게 손을 흔들며 배웅하고 있다.
김임돈 6·25 참전유공자가 통영시 산양읍 자택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취재진에게 손을 흔들며 배웅하고 있다.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박준혁 기자의 다른 기사 검색


  • -----test_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