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위한 헌신, 경남 참전 영웅을 찾아서] (22) ‘큰 공 세워도 훈장 없는’ 서동인씨

인민군 사단장·첩자 생포했지만… 빼앗긴 명예에 한숨만

기사입력 : 2024-11-06 20:59:49

삼천포서 소작농 아들로 태어나 농사일
지독한 가난에 학교 못가… 17살에 징집

부산서 기초훈련만 받고 소총수로 투입
격전지 경북 상주 화령장서 홀로 살아남아
낙동강 등 전장 누비며 죽을 각오로 전투
머리 위 총알 지나가던 소리 아직 생생

“전쟁통 상관에 공로 뺏겨 포상 못받아
그동안의 삶, 훈장으로 증명받을 수 있길”


“너무 억울하다.”

6·25전쟁 참전유공자인 서동인(91)씨는 인터뷰 내내 이 말을 반복했다. 평생 한이 맺혔는지 인터뷰가 끝나고 며칠 뒤 기자에게 전화가 와 다시 “나의 억울함을 제발 풀어달라”고 하소연했다.

소작농 아들로 자란 그의 학력은 ‘무학(無學)’이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입대한 그는 ‘안동 전투’, ‘상주 화령장 전투’ ‘속리산 전투’, ‘태백산 게릴라 토벌 작전’ 등에 투입됐다. 같이 지낸 전우들은 한 명도 살아 남지 못했다. 전쟁 동안 여러 공을 세웠지만 훈장 한 번 받지 못한 것은 그의 큰 한이다. “좀 도와 달라”는 그의 애원에 제대로 답을 해줄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70년이 지나 선진국이 됐지만, 아직 참전유공자들의 억울함을 해소하지 못한 것은 우리 사회가 반성해야 할 점이다.

서동인 6·25 참전유공자가 1950년 7월 참전한 경북 상주 화령장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서동인 6·25 참전유공자가 1950년 7월 참전한 경북 상주 화령장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돈도 없고, 백도 없고”= 삼천포가 고향인 그는 지독한 가난 속에 살았다. 끼니 걱정은 일상이었으며, 학교 문턱도 가지 못했다. 농사일하며 살아가던 중 6·25전쟁이 발발한다. 전쟁 소식이 삼천포까지 들리면서 읍내와 마을이 혼란스러웠다.

전쟁이 터지고 얼마 뒤 군에서 젊은 청년들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17살이었던 그도 대상자라 입대하게 된다. 징집장에서 모병관이 중학교에 재학 중인 사람은 나오라고 했다. 그는 무학인지라 손을 들지 못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일부 학력이 좋은 학도병들은 헌병학교로 가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잦았다고 한다.

“6월 말에서 7월 초쯤 입대한 것 같아요. 전쟁 터지자마자 간 거죠. 학교도 간 적 없고, 집도 가난하니 소총수로 배치됐어요. 학교 다녔던 제 또래들이 사관학교 가는 거 보면서 얼마나 억울하던지…”

그는 부산으로 가 일주일간 기초 훈련만 받고 제7경비대대 소총수로 전선에 투입된다. 그가 처음 인민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은 경북 상주 화령장. 상주 북부에 위치한 화령장은 6·25전쟁 초기 중요한 격전지였다.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인민군과 방어선 구축을 위해 시간이 필요했던 국군이 뺏고 지키기 위한 각축전이 벌어진 곳이다.

제대로 된 장비와 병력이 없었음에도 국군은 목숨을 걸고 싸웠고, 방어에 성공한다. 국군은 낙동강 일대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고, 미8군도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M1 소총으로 적을 막았던 그는 대규모 병력을 자랑했던 인민군을 뚜렷이 기억한다. “인민군이 국군보다 훨씬 많았어요. 제가 나이가 어리고 남들보다 빨라서 그런지 선발대로 투입됐습니다. 죽어라 고지로 올라갔죠. 총 쏘기가 힘들어 대검으로 인민군과 싸웠습니다. 정신 차리고 보면 같이 올라간 전우들은 없고, 저만 살아 있었습니다. 정말 무서웠어요.”

군 복무 중인 서동인씨 모습./김승권 기자/
군 복무 중인 서동인씨 모습./김승권 기자/
군 복무 중인 서동인씨 모습./김승권 기자/
군 복무 중인 서동인씨 모습./김승권 기자/
1953년 휴전 직전 강원도에서 전우들과 찍은 단체사진. 앞줄 맨 오른쪽이 서동인씨다./김승권 기자/
1953년 휴전 직전 강원도에서 전우들과 찍은 단체사진. 앞줄 맨 오른쪽이 서동인씨다./김승권 기자/

◇“공 세웠지만, 훈장 하나 없어”= 그는 상주 화령장 전투 이후에도 낙동강 전선을 돌며 여러 전투에 참전한다.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그는 북한 함경북도까지 진격하며 통일이 올 줄만 알았다.

하지만 10월 중순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그의 부대도 고전을 면치 못한다. 날씨가 추워지고 눈도 많이 내리는 악조건에서 중공군을 막아야 했다. 그도 몇 차례 중공군과 전투했는데 그 모습을 잊지 못한다. 흰 눈밭을 달리며 공격해 오는 중공군들은 전투 전 고량주를 먹은 탓에 겁도 없었다고 그는 떠올렸다.

이듬해 1월 4일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하게 된다.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했고, 미 8군사령부도 대구로 본부를 옮겼다.

하지만 그가 속한 부대는 강릉에서 고립돼 전멸될 위험에 처한다. 강릉 비행장 부근에 주둔해 있던 그의 부대는 결국 일본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그가 받은 임무는 강릉 시민들을 대상으로 ‘도민증’을 검사해 소지한 이들을 피란 가게끔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한 청년을 검문하던 중 그의 재킷 속에 국군 작전 지도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그는 인민군 첩자였고, 그 자리에서 생포해 헌병대에 인계했다.

그는 이후에도 1951년 초여름부터 오대산과 설악산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인다. 1951년 4월 중공군은 70만 대군을 동원해 총공세를 실시한다. 국군과 미군은 여러 차례 고지전에서 성공적으로 전투를 이겨내 동부전선이 38선보다 위로 올라갔으며, 설악산·고성 등 강원도 일대가 남한 지역에 속하게 된다.

그는 피로 얼룩진 고지전을 생생히 기억한다. 몇날 며칠을 인민군과 밤새도록 싸웠다. 적들은 높은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고, 노획한 미군 박격포를 사용해 국군의 진입을 막았다. 그도 고지를 오르다 왼쪽 팔에 적의 수류탄을 맞았다. 70여 년이 흐른 지금도 팔에는 상처 자국이 선명하다.

“워낙 눈이 많이 내려 총 조준이 힘들었어요. 나무에다가 총을 얹어 놓고 쐈는데 이것도 참 어려웠죠. 아직도 제 머리 위로 총알이 ‘쒹, 쒹’ 지나간 소리가 기억나요.”

어느 날, 고지를 점령하고 적진으로 진격을 하니 한 마을에 인민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의 부대는 비밀리에 공격을 시작했고, 작전은 성공했다. 그가 한 초가집에 들어가니 인민군 10사단장이 숨어 있었다. 그는 사단장을 생포해 대대에 인계했다. 사단장 군모에 별 두 개가 있었던 걸로 봐서는 인민군 소장이었을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인민군 사단장과 첩자를 생포하는 공을 세웠지만, 그는 훈장 하나 받지 못한 게 큰 한이다. 불합리한 구조 때문에 상관들이 공을 독차지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포상이나 훈장은 전혀 없었어요. 오늘 죽을 수 있다는 각오로 싸웠고, 나름 공도 큰데 아무도 몰라주니 그게 제일 섭섭해요. 전쟁통이라서 상관들이 저의 공을 뺏어가는 줄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화나요. 차라리 그때 화라도 크게 낼걸.”

서동인 6·25 참전유공자가 전투 중 수류탄에 맞아 부상당한 흉터를 가리키고 있다./김승권 기자/
서동인 6·25 참전유공자가 전투 중 수류탄에 맞아 부상당한 흉터를 가리키고 있다./김승권 기자/

◇잊힌 명예, 되찾아주길= 1953년 7월 27일 동부전선에서 휴전을 맞은 그는 그제야 총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입대 후부터 지금까지 생사를 함께한 전우들은 모두 전사하고 없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게 ‘기적’이라고 말했다.

휴전 이후에는 강원도 주요 탄광과 김포 비행장(김포공항) 등에서 경비 임무를 맡으며 군 생활을 했다. 1956년 일등 중사로 제대한 그는 삼천포로 돌아와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지금은 매일 노인 유치원에 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돈도 필요 없고 훈장 하나 받는 게 마지막 소원이다. “대한민국을 위해 충성을 다해 싸웠어요. 사람도 죽였습니다. 사단장도 생포했고, 첩자도 잡았어요. 돈 조금 나오는 거는 이제 살날도 얼마 안 남아 필요 없습니다. 저의 삶이 훈장 하나로 증명됐으면 하네요.”

인터뷰를 마친 그는 제복을 벗고 옛 유공자 조끼를 입었다. 그는 참전유공자임이 자랑스러워 매일 조끼를 입고 노인 유치원에 간다. 마지막까지 “나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한 그는 손을 흔들며 친구들 곁으로 돌아갔다.

서동인 6·25 참전유공자가 사천시 한 노인유치원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취재진에게 손을 흔들며 배웅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서동인 6·25 참전유공자가 사천시 한 노인유치원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취재진에게 손을 흔들며 배웅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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