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며] 해병 정신- 양영석(지방자치부장)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지는 진해다.
1948년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육군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사건의 진압을 거부하며 일으킨 여수·순천 10·19사건 이후 진압 과정에서 상륙부대의 필요성을 느낀 해군에 의해 만들어졌다. 1949년 4월 15일 덕산비행장 격납고에서 해군에서 선발된 380명의 병력으로 창설식을 가졌다.
덕산비행장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해군이 건설한 20만 평의 경비행장으로 광복 직후에는 미군이 사용하다가 1947년부터 육군이 점유하고 있었다. 해병대 창설 당시 비행장은 황량한 들판으로 갈대와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그대로 야외훈련장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덕산비행장 서북쪽의 동내산과 천자봉은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해병들의 피와 땀이 흠뻑 스며 있는 주 훈련장이었다. 이곳에서 체득한 전투력은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에서 거둔 혁혁한 무공의 바탕이 됐다.
이에 해병대는 1964년 4월 15일 창설 15주년을 맞아 동내산에 ‘해병대 처음 세운 곳’이라고 새긴 발상탑을 세워 해병대 역사의 연원을 이루게 했다. 또 시루봉 자락에 크게 터를 잡아 ‘해병혼’이라는 세 글자를 한 자 한 자 떼어 돌로 짜서 만든 다음 횟가루로 도색해 훈련소 연병장에서도 또렷이 보이도록 했다.
초기 해병대는 열악해 일본군이 남기고 간 소총과 교범, 군복을 활용해야 했다. 제대로 된 훈련시설도 없어 강인한 전사로 거듭나고자 천자봉을 뛰어올라가는 훈련을 했다. 이것이 악명 높은 ‘천자봉 구보’다.
훈련장에서 천자봉까지 ‘어깨총’도 아닌 ‘앞에 총’ 자세로 소총을 들고 가파른 산길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구보로 뛰어오르면 실신 지경이 된다.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거기에 더해 힘들어하는 동료를 도와주고 서로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워 줘야 한다. 한 명의 낙오 없이 완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전우애가 싹튼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수식어와 전역해 해병 출신을 만나면 기수부터 물어보는 문화가 이렇게 생겼다.
이후 천자봉 구보는 ‘천자봉 행군’으로 바뀌어 해병대의 전통이 됐다. 해병대훈련 중 지옥의 행군코스 종착역으로 천자봉을 거쳐 마지막 시루봉에서 부모님이나 애인 이름을 목청껏 부르며 해병훈련의 고달픔을 달랬다. 진해에서 훈련받은 해병이라면 누구나 시루봉에서 찍은 단체사진을 한 장씩 간직하고 있다.
천자봉 행군은 해병대 교육훈련단이 포항으로 옮겨간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제2의 천자봉으로 지정된 운제산 대왕암까지 38㎞를 걸어가는 천자봉 행군을 마쳐야 진정한 해병이란 의미로 ‘빨간 명찰’을 수여한다.
그렇게 7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해병정신이 시험대에 오른 일이 1년 전 발생해 아직까지 매듭지어지지 않고 있다. 바로 해병대 제1사단 채 상병 사망 사건이다.
훈련, 대민구조, 작전 과정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인명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사고 원인이 지휘관의 오판 때문이라면 그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 그 자체로 과실인 데다 전시 상황이라면 부하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국회 ‘채 해병 특검법 입법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전 대대장은 “저는 처음부터 책임을 회피할 생각이 없습니다…. 전우를 지켜줘야지 해병대입니다”고 했다.
잘못이 있으면 변명하지 않고 책임지는 것, 나를 희생할지라도 전우와 부하를 지켜주는 것. 그게 진짜 해병이다.
양영석(지방자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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