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파] 네포티즘- 양영석(문화체육부장)

개인의 능력, 재능, 성과에 따라 사회적 지위나 보상이 결정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누군가의 배경, 특히 혈연이나 친분이라는 보이지 않는 선이 기회의 공정성을 흔들 때가 많다. 이를 ‘네포티즘(nepotism)’이라고 한다. 이 용어는 라틴어 nepos(조카)에서 유래했다. 중세 시대 가톨릭 교황들이 조카 등 가까운 친족을 요직에 앉히던 관행에서 비롯된 이 말은 오늘날 특권과 연줄 문제를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네포티즘은 우리 사회의 전반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연예인의 자녀가 별다른 경력을 쌓지 않고도 주요 배역을 맡거나 정치인의 가족이 검증 없이 권력을 행사하는 사례가 흔하다. 이 문제의 본질은 단순히 ‘특정인이 혜택을 받았다’는 데 있지 않다. 그 혜택이 특정 집단에만 몰리는 구조로 인해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지 않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배제되는 데 있다. 이는 한 개인의 성취 가능성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최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불법 총기 소지 및 탈세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던 차남 헌터 바이든을 사면해 논란이 되고 있다. 그간 “사면하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을 퇴임 한 달여 앞두고 뒤집었기 때문이다. 이를 사법권 남용이라고 비판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2기 행정부 내각을 꾸리면서 장녀 이방카의 시부인 찰스 쿠슈너를 주프랑스 미국 대사로 지명한 데 이어 차녀 티파니의 시부인 마사드 불로스를 아랍·중동 선임고문에 지명했다.
▼누구보다 민주주의 가치를 지켜야할 미국 대통령들의 네포티즘에 입각한 사면권·임명권 행사는 민주주의 근간인 기회의 평등과 권력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는 퇴행적 움직임이다. 무엇보다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표본으로 자리 잡아온 미국 위상을 실추시키고 있다. 미국 민주주의가 난기류에 접어들었다.
양영석(문화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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