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ON- 이달균의 경남 영화 촬영지 돋보기] (11) 취화선- 하동 백련리 도요지
화르르 피고 하르르 지다, 화가의 삶도 도공의 혼도…
조선후기 천재화가 장승업 일대기 다룬 이야기
‘고려다완’ 복원한 백련리 가마서 마지막 촬영
예술 혼 불태우던 주인공 불가마 속으로 사라져
임권택, 2002년 한국 최초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

하동 백련리 도요지 가마./이달균 시인/

◇조선 후기를 살다간 광기의 화가
취화선. 오원 장승업(1843~1897)은 그림에 취한 사람인가 술에 취한 사람인가. 2002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2개의 포스터로 영화를 상징한다. 장승업이 술병을 들고 기와지붕 위에 올라앉아 있는 장면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인천 영종도 뻘밭을 걸어가는 이미지로 꾸며졌다. 이는 장승업의 지난한 생애가 유랑이었음을 보여주고, 또 다른 한편으론 한 시대를 풍미한 대가의 모습보다는 천진난만한 인간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게 그려낸 것이다.
그렇다면 장승업,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술을 좋아한 천재 화가 장승업 정도로 정의하면 될까? 임권택 감독은 장승업의 최후를 가장 극적으로 그려 내었다. 활활 타오르는 도자기 가마 속으로 들어가 최후를 마치는 광기의 화가. 감독은 왜 장승업의 죽음을 이렇게 그렸을까? 고운 최치원도 마지막을 알 수 없어 후대 사람들은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고 믿지 않았는가. 이처럼 장승업의 생애 역시 상당 부분 가려져 있어 영화의 대미를 신화적으로 장식할 수 있었다. 연구자들에게는 불행이겠으나 영화감독에겐 이보다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려진 부분은 관객의 상상에 맡기면 되니까.

영화 ‘취화선’ 스틸컷.
◇임권택 감독, 한국의 아름다움을 그리다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함께 조선 3대 화가로 불린다. 앞의 두 화가에 비해 생애는 비교적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김홍도는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였던 강세황이 스승이었고, 신윤복은 궁중화원에서 임금의 어진을 그린 신한평이 아버지였다. 그러나 장승업은 고아였고 한반도에 열강들의 침탈이 가속화되던 시기를 살았으며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기에 정확한 생몰연대를 알기는 어렵다.
아주개라는 종이 파는 집에서 일하다 동지중추부사 이응헌을 만나게 되고, 그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게 된다. 이응헌의 집엔 국내와 중국의 그림들이 많았는데 이때 그림에 대해 눈을 뜬다. 처음엔 붓 쥐는 법도 제대로 몰랐으나 화인들의 솜씨를 보면서 그림을 익혀나간다. 이응헌은 그의 일취월장하는 솜씨에 반해 후견인이 되고, 그림은 신품(神品)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 소문은 고종임금께로 전해지고, 궁으로 불려가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러나 어디 매이지 못하는 그였기에 몰래 궁을 빠져나오고 만다.
임금의 명을 어긴 그를 민영환이 거둬 임금이 원하는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이마저도 구속이라 여긴 장승업은 도망쳐 버리고, 애초에 명 받은 병풍 십수 첩은 끝내 완성을 보지 못한다. 민영환이 목숨을 구원해 주었음에도 곧 그의 집에서도 탈출하여 저자를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고 그림을 그렸다.
민영환 외에도 장승업을 후원한 인물은 한성부 판윤 변원규, 흥선대원군 이하응, 오세창, 오경연 같은 당대 쟁쟁한 인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여자를 좋아해서 미인이 옆에 앉아 술을 따라 주면 최고의 그림이 나왔다고도 한다. 속박을 싫어하여 40세가 넘은 나이에 장가를 들었으나 하룻밤 만에 집에서 도망쳤다는 일화도 있다.
돈과 명예보다는 인간적인 교감과 술이 먼저였던 광인 예술가 장승업의 생애는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만다. 1897년 55세에 이르러 행적이 묘연해지는데, 누군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고 또 다른 누구는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영화 ‘취화선’ 스틸컷.
타고난 기질이 그러하듯 특정한 유파나 기법, 화풍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렸다. 때로는 선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거나 정묘한 채색을 하기도 하고, 호방한 필묵으로 먹의 농담을 극대화하는 등 한군데 국한되지 않은 필법을 자랑했다. 일생 수없이 그림을 그려서인지 전하는 그림도 많다. 현재 우리나라에 500여 점, 북한의 조선미술박물관에 100여 점에 이르는 작품이 남아 있다.
장승업의 얼굴 위에다 임권택의 모습을 오버랩시켜 보았다. 혼란한 시대를 살다 간 장승업과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고뇌한 임권택 감독은 여러모로 닮은 꼴로 보인다. 실제 어떤 인터뷰에서 감독은 “20대에 화가가 돼 평생 그림에 매진한 것이나 술을 즐기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산 성향을 생각하면서 어떤 장면에선 내가 그 필름 안에서 찍히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라고 말했다.
화가가 주인공이다 보니 그림 그리는 장면이 여러 군데 나온다. 촬영을 위해 60여 점의 그림을 그린 이는 김선두 중앙대 한국화 전공 교수. 김 교수 역시 영화 촬영 도중 부단히 거듭나고, 새로워지려는 예술가의 번뇌를 체험했다고 한다. “장승업이라는 인물을 통해 임권택 감독님이 추구하던 미적 세계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한국화뿐 아니라 국악·한복·다도·서예 등 각 분야의 장인들이 참여해 한국 문화계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만들어진 작품이기도 하다.
임권택은 한국의 아름다움을 세계인에게 각인시킨 대표적인 감독으로 평가된다. 영화는 사람의 삶을 그려내는 그릇이다. 그 삶을 통해 우리네 일상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현재 자신의 가치를 가늠해 보는 것이 아닌가. 그런 관점에서 가장 한국적인 미를 나타내는 것이 자신의 영화관이라고 밝힌다. ‘만다라’, ‘춘향뎐’, ‘서편제’가 그랬고, ‘축제’, ‘취화선’, ‘천년학’으로 이어지는 행보는 한 편의 옴니버스 소설처럼 얼개가 짜여진다.
이 영화는 2002년 한국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국내에서는 청룡영화상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 촬영상(정일성)을 수상한다. 2002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큰 흥행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국내외에 한국 영화의 우수성과 임권택이란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이다.

도요마을 체험장./이달균 시인/
◇마지막 장면 촬영지, 하동 백련리 도요지
그렇게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 장소인 하동군 진교면 백련리 사기아름마을 찾아간다. 이곳은 고려다완을 복원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고려다완을 말하기를, 완벽을 넘어선 불완전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유약 처리가 완벽하지 않아도, 흙 입자가 다소 드러나도 미완의 그릇은 매력으로 다가온다. 궁이나 지체 높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위한 질박함이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인식된다. 세월 속에서 유약 처리가 덜 된 부분에 찻물이 배어 변해 가는 색은 민초들의 소박함과 유사하다.
인터넷 정보를 검색하면 아름마을 조성사업 추진으로 도예 관련 농촌 테마형 문화체험이 가능하고, 각종 편의시설과 테마 시설이 잘 갖춰진 곳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아니, 그런 과정을 향해 가다 짐짓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기아름마을을 지키고 있는 도예가 정웅기씨를 만난 것이라고나 할까. 그는 25세에 이곳에 들어와 40년 세월을 도자기와 다완을 구우며 지켜오고 있다. 마을 입구엔 도요지를 뜻하는 도자 조형물을 설치해 두었는데 약간 방치된 듯한 기분이 든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아늑한 골짜기에 정웅기씨의 갤러리와 도자기 가마가 고적한 자태로 앉아 있다. 물론 영화 속 장승업이 뛰어든 그 가마는 없어진 지 오래다. 당시 고려다완 재연을 위해 노력했던 ‘세미골요’의 주인인 장금정씨는 고인이 되었고, 그 터전도 풀이 무성하게 자라 폐허로 변해 있다.
“임권택 감독은 이틀 동안 촬영팀을 이끌고 여러 번 레디 액션과 컷을 외쳤지요. 하지만 정작 영화에는 1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 나왔을 뿐입니다.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사라지는 명장면 하나를 건진 것이지요. 어쩌면 영화의 미학은 수많은 장면의 필름을 잘라내어 완성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 도예인들이 여러 날을 흙으로 빚어낸 자식들이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불과 몇 작품을 얻는 것과도 같은 이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영화를 촬영한 지가 벌써 20년이 훨씬 지났다. 그래서인가. 마을에는 영화 ‘취화선’과 관련한 어떤 글 한 줄, 그림 하나도 걸려 있지 않다. “비록 몇 장면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하동 문화의 역사라면 역사라 할 수 있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드네요”하고 정웅기씨는 말한다.
이곳 하동과 섬진강 건너편 광양시 다압면 매화마을은 임권택 감독과 인연이 많은 곳이다. 1996년 작인 ‘축제’를 연출하면서 임권택 감독은 오정해와 소리꾼의 대화를 통해 이런 대사를 넣었다. “옛적 살림 있는 집에는 소리 들으며 임종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 나중 그 대사는 2007년 작 ‘천년학’을 통해 실현된다. 오정해가 소실로 있던 집 노인이 죽을 때 눈먼 소리꾼인 그녀는 애끓는 소리로 저승길을 배웅한다. 그 죽음 위로 매화 꽃잎이 하르르 진다. 그런 장면으로 인해 이승을 떠나는 길이 더욱 표표해 보이도록 했다.

도요지 조형석물./이달균 시인/

하동요 전시관 실내./이달균 시인/
◇불가마 속으로 몸을 던진 신선
이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천재는 돌밭에 굴러도 빛난다. 1850년대, 어린 승업(최종성)은 청계천 거지소굴 근처에서 거지패들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있다. 길 가던 선비 김병문(안성기)은 이런 승업을 구해준다. 승업은 맞은 내력을 말하며 선비에게 그림 한 점을 그려 보인다. 작은 손으로 그려내는 그림은 예사롭지 않다. 화선지를 휘감는 붓은 거칠지만 힘찬 손놀림으로 형상을 찾아간다.
김병문은 지긋지긋한 세도정치에 편승하고 싶지 않았는데 승업의 자유로운 붓놀림이 꼭 자신을 닮은 듯하여 집에 데리고 간다. 그의 집엔 중국 그림과 조선 그림들이 많았고,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그림을 그리곤 했다. 당대 화원들의 솜씨를 어깨너머로 배우면서 일취월장 성장해가는 승업(정태우)에게 병문은 진정한 예술가의 자세를 추구할 것을 독려하고 훌륭한 화가가 되라는 뜻에서 오원이라는 호를 지어준다. 그렇게 김병문은 승업의 후견이 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역관 출신으로 고서화와 금석문에 조예가 깊은 인물인 이응헌(한명구)에게 승업을 소개한다. 이응헌의 집에서 머슴 겸 객식구가 되어 살던 중 이응헌의 여동생 소운(손예진)에게 반하지만, 가슴 설레는 첫사랑은 소운의 혼인으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세월이 흘러 소운이 죽어가면서 자신의 그림을 청한다는 전갈이 왔다. 그는 소운에게 달려가지만 죽음과 맞닥뜨린 운명 앞에서 절망을 경험하고 강토를 방황하게 된다. 애초에 붓자루도 쥘 줄 몰랐는데 신운(神韻)이 감돌았는지, 손이 내키는 대로 붓을 휘두르고 먹물을 뿌려 매난국죽, 산수, 영모 등 거침없이 화명을 떨쳐나갔다.
이제 천재 화가 승업의 소문은 한양 고을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때 또 한 사람의 여인과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기생 매향(유호정)이다. 그녀는 몰락한 양반 가문의 딸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데 생황 연주의 달인이다. 매향과 승업의 인연 또한 그리 순탄치 않다. 계속되는 천주교 박해로 매향은 어려움에 처하고, 둘은 두 번의 이별과 재회를 나눈다. 광기 어린 젊은 화가를 사랑하는 유일한 여인인 매향은 솜씨 있는 화인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진정한 화인이 되길 기원한다.

영화 취화선의 주인공 장승업(최민식)이 하동 백련리 도요지 불가마 속으로 몸을 던지기 전 생각에 잠겨있다.
“저 심심하고 무덤덤한 항아리는 어디서 구했는가.”
“욕심 없이 무심한 마음으로 그저 흥에 겨워 손 가는 대로 빚은 그릇이지요. 왠지 모자라는 듯 너그럽고 여유롭고 따스하지 않습니까.”
영화 속에서 장승업(최민식)과 매향이 달항아리를 두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임권택 감독은 화가 장승업의 재능과 일대기에 포커스를 맞추기보다 그동안 추구해왔던 정겹고 소박한 한국의 미(美)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승업은 이미 방황의 숲을 걷고 있으며 술동이와 한 몸이 되어 있었다. 억척스런 동거녀 진홍(김여진)이 그를 정성껏 보필하였으나 그는 늘 머물지 못하고 떠돌았다. 고종 임금은 그를 대령화원(待令畵員)으로 불러들이고, 정6품 감찰직에 제수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하며 궁에서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런데 술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열흘 만에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문지기에게 그림 도구를 구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한밤중에 궁궐을 탈출한다. 몇 번이나 그런 일이 반복되어 임금의 진노를 샀으나, 도저히 술의 흥취에 빠지지 않으면 붓과 벗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장승업에게는 개인 사정이지만, 당시 고종 임금에게는 국가적 명운이 걸린 문제였다.
화명과 비례하여 고뇌는 더욱 깊어간다. 붓끝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술병을 들고 세상을 조롱하기도 한다. 새로운 변화의 꼭짓점은 어디일까를 생각하며 자신의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한다. 그런 어느 날, 온몸의 기가 손끝을 타고 붓에 이른다. 매향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그녀가 그토록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볼품없는 그릇을 본다. 장승업은 그 안에서 자신이 그토록 도달하려는 경지를 보았던 것일까. 스러져가는 자신의 운명인 듯 홀연히 세상을 등지고 만다.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몸을 던진 그는 어느 하늘을 날고 있을까. 삶과 죽음은 뜬구름과 같으니 노닐고 싶은 곳에서 구름 타고 놀고 있을까. 그토록 염원하던 세상에 닿았을까.
2023년 2월 러시아 국립 크렘린 박물관에서는 한국미술품특별전이 열렸다. 이 특별전에는 오원 장승업의 대작 〈취태백도〉를 비롯한 흑칠나전 이층농을 비롯한 공예품 4점이 대대적인 복원 과정을 거쳐 127년 만에 전시 공개되었다. 이 러시아 국립 크렘린 박물관 무기고에서 발견된 미술품은 1896년 고종이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외교선물로 보낸 것이라고 한다.
그해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아관파천’ 사건이 일어난 해였기에 이 그림은 중요한 외교 선물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엘레나 가가리나 크렘린 박물관장은 황실 무기고에 보관되어 공개되지 않은 조선의 외교 선물을 복원 과정을 거쳐 공개하면서 〈취태백도〉가 장승업의 그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그림엔 ‘조선 오원 장승업’이란 글이 쓰여 있다. 비록 술이 고파 몇 차례나 궁을 빠져나왔으나 이렇듯 품격 높은 그림을 그렸으니 누가 그를 일러 천재라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영화 취화선을 보면서 침탈의 역사를 헤엄치던 1800년대 말의 조선과 그 시대를 살다 간 화가 장승업,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름을 되새겨 보았다. 비록 백련리 도요지는 정체되어 있지만, 다시금 이곳에 젊은 도공들이 들어와 그 정신을 계승해 가기를 기원해 본다.
이달균(시인)
양영석 기자 yys@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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