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작업실 (17) 박정국 서각예술가

나뭇결 따라 톡톡톡… 내면의 자아 새기는 공방

기사입력 : 2024-08-21 19:42:03

어린 시절 마을 어른 도장 파주던 소년
취미로 서각 입문한 뒤 24년간 열띤 활동

14년 전 마산 산자락에 작업실 이전
나무 벌목부터 가공까지 손수 진행

5400자 적힌 ‘금강경 10폭 병풍’ 7년 걸려
붓 흐름 생각하며 한자 한자 정성껏 깎아

“전통 기반 현대화 작업 이어가고파
서각 미래 위해 예술 다변화 필요”


진해 주포마을에는 손재주 있다고 소문난 소년이 있었다. 마을 사람은 누구나 소년이 만들어준 목도장을 가지고 다녔다. 도장을 파내던 작고 뽀얀 손이 거칠고 주름 잡힌 손이 되기까지 깎고 파내는 일을 잇게 된 것은 운명 같다. 마산의 한 산자락, 유쾌한 망치소리가 노래처럼 울리는 박정국(59) 서각예술가의 작업실은 인생을 함께한 서각을 향한 마음이 톱밥처럼 쌓인 곳이다.

박정국 서각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서각을 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박정국 서각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서각을 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서각의 모든 것이 모인 곳

-사람들이 작업실에 모여 있어 놀랐다. 따로 서각교실을 하는 것인지?

△내 제자나 지역 서각가들이다. 서각이 망치질을 하고 시끄러운 예술 분야라서 가정집에서 할 수가 없다. 따로 작업실이 필요한데 없는 이들을 위해서 늘 작업실을 열어두고 있다. 내가 없어도 다들 여기서 작업을 한다.

-확실히 주변에 거주지가 없으니 작업이 자유롭겠다. 작업실은 언제 구하게 됐는지.

△14년 전쯤인가. 예전에는 내서 삼계쪽에 컨테이너에서 작업을 하고 제자들 가르치고 했다. 그런데 동네가 점점 발전돼 빌라 등이 계속 들어오다 보니까 저녁에는 민원 때문에 작업을 할 수 없었다.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국 민원이 걸리지 않는 곳을 찾아서 이곳으로 오게 됐다.

-작업실 뒤편에 나무가 잔뜩 쌓여 있다. 앞에 지게차도 있는데, 서각 재료인 나무들을 직접 가져오고 다듬는 것인가?

△서각은 나무를 고르는 것부터 시작한다. 가까우면 내가 직접 가져오고 멀면 나무 얼만큼 잘라서 보내 달라 하기도 한다. 나무는 벌목해 보면 속을 벌레가 먹었거나 썩었거나 해서 빈 경우가 있으니 꼭 실제로 살펴보고 정해야 한다. 또 나무를 단단히 만들어야 하니 7~8년 정도 건조를 시켜야 해서, 지금 보이는 나무들은 건조 중이라고 보면 된다.

작품에 사용하기 위해 건조 중인 나무들.
작품에 사용하기 위해 건조 중인 나무들.

-제단기도 따로 있다.

△그렇다. 제단기나 반자동화된 일면대패, 수평기계 등 작업을 위해 필요한 것들도 다 있다. 이 작업실이 서각의 전 작업 분야를 다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공방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가공 작업까지 직접 하는 이유가 있는가.

△서각은 개인의 기술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나무와 소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무의 나이테나 상처 등 여느 흔적으로 나무의 삶을 짚어보며 무언의 대화를 가진다. 미안함과 감사함, 또 이들이 작품으로서 천 년을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전한다.

-서각 하면 칼과 망치인데, 크기도 다양하고 종류가 대단히 많다.

△창칼, 뜰칼, 환도, 아사도, 쇠망치, 나무망치 등이 있다. 칼만 90자루가 넘는다. 다양한 도구가 있으면 그만큼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으니 많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작업실에 작품을 모아둔 전시장도 있는데.

△큰 작품이 많으니까 보관할 곳도 필요하고, 사람들이 놀러 오면 같이 작품 얘기도 하고 싶어서 전시장처럼 작품을 놔두게 됐다.

가로만 10m가 넘는 ‘금강경 10폭 병풍’.
가로만 10m가 넘는 ‘금강경 10폭 병풍’.

◇한 자 한 자의 가치

-제일 큰 작품이 ‘금강경 10폭 병풍’이다. 큰 병풍에 작은 글씨들이 빼곡히 적혀 있는데, 긴 시간이 걸렸을 것 같다.

△그렇다. 병풍 하나의 크기가 가로 40㎝에 세로 170㎝이고 그게 열 개가 모여 10폭 병풍이다. 도합 7년이 걸렸다. 규모가 큰 작품이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했으면 했기에 컨디션이 안 좋거나 집중이 안되는 날에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긴 시간이 걸린 것 같다.

-투박한 칼과 망치로 하는 작업인데 작은 글씨를 양각(陽刻)하는 게 경이롭다. ‘동다송 17품’은 글자 크기가 1㎝가 안되는 것 같은데.

△그렇다. 크건 작건 모든 글자를 한 글자, 한 글자 최선을 다해 깎아야 하기에 글씨가 작아서 특별히 더 힘들다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글자를 새기는데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앞서 말했듯 한 글자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글자 하나가 흐트러지면 그 전체가 다 망가진다. ‘금강경 10폭병풍’에는 총 5400자가 적혀 있는데, 첫 자와 마지막 자를 대비하면 차이가 없다. 글자의 폭, 각도에 흐트러짐이 없다는 뜻이다. 글자 하나하나 붓의 흐름을 생각하면서 각을 해야 한다. 서각가들은 이를 위해서 필수적으로 서예를 한다. 붓의 흐름을 모르면 각만 되지 글자는 안되는 꼴이다.

-서각을 한 지 24년이 됐다고 들었다. 서각에 흥미를 가진 것은 언제부터일까.

△서각이 무언가를 깎는 작업이라면 어린 시절부터다. 우리 어릴 때는 민둥산이 많아서 촌에서 나무 심기를 했다. 나무 심으면 돈을 줬는데 그 돈을 받으려면 도장이 필요했다. 그때 내가 국민학교 학생이지만 손솜씨가 좋아서 부탁을 많이 받아 어른들 목도장을 파고 그랬다. 커서는 까맣게 잊었는데 ‘주5일제’ 도입으로 취미 삼아 서각을 찾게 됐다.

-취미로 시작한 서각이 본업이 되어버린 것인지. 지금은 한국서각협회 이사장이기도 하다.

△사실 일을 하면서도 나무판대에 글자도 써보고 했는데, 그때는 이게 서각이라 생각도 안했다. 그러다가 처음 배웠는데, 연습용으로 숙제를 내줬더니 바로 작품을 들고 와 버린거다.(웃음) 그랬더니 선생님이 바로 문하생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라. 그래서 본격적으로 서각을 하게 됐다. 그렇게 입문하고 작가로서도, 실무적으로도 열심히 했더니 작년에 이사장이 됐다.

◇서각의 오늘과 내일

-서각 작품 하나에 긴 시간이 소모된다. 작가님이 개인전을 이제까지 7번 거쳤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나한테 개인전이라는 것이 작품 판매를 목적으로 하기보다 ‘내가 이런 작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선보이는 장이다. 개인전마다 기법과 주제, 장르를 계속 변화시키고 있다. 아무리 개인전을 많이 해도 처음과 마지막이 같다면 변화가 없다고 생각한다.

-서각이라는 예술이 상업적으로는 재실이나 사찰, 이런 곳에서 많이 쓰였는데. 생활 양식이 변하면서 장르 자체가 힘들게 된 것 같다.

△그렇다. 한옥 문화에서 아파트 문화로 바뀌면서 많은 전통문화들이 위기를 맞이했듯이 서각도 그 위기 앞에 있다. 그렇기에 서각이 단순히 글을 새기는 각수에서 벗어나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맞이해야 하는 기점이 왔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고 서각하는 모두가 자신의 개성을 뚜렷이 발휘할 수 있는 작품을 다루게 됐으면 한다.

-작가로서의 목표가 있다면.

△전통을 기반으로 현대화 작업을 이어가고 싶다. 그러니까 서각이라는 예술을 다변화시킬 수 있는 시도를 계속 해 볼 거다. 다음 개인전은 경전이나 사찰 이런 방향으로 하고 싶어서 경전을 위주로 한 작업을 다양한 시도와 함께 하고 있다.

어태희 기자 ttott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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