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작업실 (18) 김태홍 서양화가
40년 역사 ‘창작 연못’… 붓으로 불어넣은 생명이 유영하는 곳
대학시절 카메라 배우러 마산행
경남대학교서 미술 가르치며 정착
가로수길 주택가에 작업실 마련
창원미술협회 창단 멤버로도 활동
활동 초기 어시장 풍경 그려오다
옛 도청 연못서 잉어 보고 영감 얻어
잉어 그림 연작… 지역서 조명받아
최근 작품엔 가로수길 풍경화 보여
“인물·정물 등 세심한 묘사 벗어나
마음에 있는 걸 그대로 그리고파”
창원 용호동 가로수길을 방문했다면 한 번은 봤을 곳이다. 파란 지붕의 주택, 녹색 대문 위 고개를 내민 빨간색 문패. 하얀 글씨로 ‘서양화가 김태홍’이 써 있다. 가로수길 터줏대감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싱그러운 인사를 건네는 이곳은, 김태홍(78) 화백의 작품이 생명력을 가지고 유영하는 창작의 연못이다.

김태홍 화백이 지난 10일 창원 용호동 가로수길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잉어 작품을 손보고 있다./전강용 기자/
◇창원 가로수길 터줏대감 화가
-지나가는 사람마다 궁금했을 것 같다. ‘가로수길’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작업실이라고 들었는데, 얼마나 됐는지?
△40년 전쯤 이 작업실을 만들게 됐다. 작업을 마음껏 하고 싶었다. 그림이라는 것이 공간에 큰 제약을 받지 않을 것 같지만, 규모가 큰 그림은 그만큼의 공간이 필요하다. 내 스승님의 경우 크기가 2000호, 3000호 되는 작품도 그려냈다. 그런 생각으로 지었고, 또 내 작품만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도 필요했다.
-원래 고향은 서울인데, 어떻게 창원으로 오게 됐나?
△나는 대학생 시절 장리석 화백(1916~2019)을 사사(師事)했다. 스승님은 내 그림이 툴루즈 로트렉(프랑스 인물파 화가) 같은 화풍과 어울릴 것 같다고 했는데 나는 살바도르 달리(스페인 초현실주의 화가) 같은 화가가 되고 싶었다. 어떤 형태의 사진을 찍어서 그것을 좀 비틀어 보려고 했다. 그때 마침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카메라 회사가 생겼다 해서 3~4년만 배워서 카메라로 예술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 마산에서 10년을 살았다.
-3~4년만 일하다 가려 했는데 어쩌다 창원에 터를 잡게 됐나. 초기 작품에는 마산 어시장의 풍경들이 있었다.
△카메라에 대해 여러 가지 연구를 했었는데, 내가 생각한 그 기법들이 안되더라. 바로 올라가야 하나 생각을 했는데 경남대학교에서 내 수채화 작품을 보고 연락이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여기 정착을 하게 됐다. 그때만 해도 어시장의 토요일, 일요일은 내 무대였다. 지금은 그 모양새가 반듯하지만 옛날에는 물건을 나무상자에 놓고, 소쿠리에 놓고 그랬다. 사람도 많았고, 정말 재밌었다. 그 장면을 담아가고 싶었는데, 스케치를 하거나 사진 찍는 것을 상인들이 싫어해서 물건을 그대로 사서 집에 가져와 그려놓곤 했다.
-오랜 시간 창원에서 화가로 활동했다. 창원미술협회의 창립멤버이기도 하다고.
△그렇다. 당시(창원·마산·진해 통합 전) 창원미술협회가 없어서 교수 몇 사람과 모여 창립을 함께 했다. 지금은 흔히 지역 화가들이 그림을 가르치지만 그때는 지역에 화가가 많지 않던 시절이어서 내가 제일 처음으로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알려주고 했었다.

김태홍 화백의 작업실 대문 위로 김 화백이 직접 제작한 ‘서양화가 김태홍’이라고 적힌 문패가 있다.
-사실 작업실에서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서양화가 김태홍’이라 적힌 빨간 우체통(?) 같은 문패다.
△저게 자동차 엔진이다. 10년쯤 됐나, 당시 지프(JEEP)를 타고 다녔는데 봉암동 근처에 전문 정비소가 있었다. 그 정비소 옆에 저 엔진이 있었는데 보니까 녹은 조금 슬었지만 한 군데도 흠이 없고 완전히 새거 같더라. 그걸 받아와서 빨간 페인트를 뿌려놨더니 멋들어지게 됐다. 남들 눈에도 그런지 누가 저거를 찍어서 인터넷에 올렸더라. 시간이 지나서 색이 옅어졌는데, 한번 더 칠해보려고 한다.
-손재주가 좋은 것 같다. 작업실 앞에는 직접 만든 것 같은 연못이 있는데.
△잉어 때문에 만들었다. 예전에 한 마리당 2만~3만원 하는 작은 잉어를 사서 수조에 넣어놨는데 10년이 지나니까 팔뚝처럼 크기가 커졌다. 감당이 안돼서 작은 연못처럼 만들어서 잉어를 풀어놨다. 쌍계사에 있는 스님이 말하는데, 잉어는 전설에 생명력이 길어서 나중에 용이 된다고 하더라. 잉어 보는 걸 참 좋아한다.

김 화백이 최근 그려낸 가로수길 풍경화.
◇잉어가 나를 살렸다
-생명력이 넘치는 잉어 그림은 김태홍 화백의 시그니처이기도 하다. 잉어를 그리기 시작한 이유가 궁금하다.
△30년쯤 된 것 같다. 경남도청을 갔는데 옛날에 연못이 하나 있었다. 그때 빨간색, 노란색의 큰 잉어들이 떼 지어 다니더라. 수면 가까이 올라와서 물을 튀기면서 움직이다가도 깊은 곳으로 금세 사라지고 그랬다. 그 잉어들의 움직임에서 힘을 느꼈다. 전까지는 어시장에서 죽어있는 생선들을 그리다가, 그 모습을 보고 생동감 있는 것을 그리고 싶어졌다. 아, 그때부터 이제 어시장은 그만하고 잉어로 가야겠다 싶어서 잉어를 그리기 시작했다.
-잉어 그림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잉어 그림 자체가 참 힘이 있고 멋지다. 또 예전에는 지역에서 꽃 그림이나 풍경, 인물화 그런 것들만 많았다. 잉어 그림은 없었기에 잉어만 전문적으로 그려내는 게 조명을 받게 된 것도 있었다. 거기다가 옛날부터 과거시험 보는 사람들이 잉어 그림을 부적처럼 가슴에 넣고 다녔다는데, 그런 비범한 효과가 있는 건지 내 잉어 그림을 사가는 사람들이 다 잘됐다고 하더라. 회사가 잘 안 된다고 그림을 사갔는데 이상하게 그 이후로 잘되고, 자녀가 몇 번이나 떨어지던 시험에 붙고 그런 것들이다.

김 화백이 최근 그려낸 가로수길 풍경화.
-실제로 잉어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작가님도 잉어와 관련된 기억이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 어느날 서울에서 어머니가 내려오셔선 절에서 적어준 게 있으니 ‘잉어를 일주일에 한 번씩 주변에서 제일 큰 연못에 방생하고 이걸 읽어라’고 하셨다. 그래서 어시장에서 한두 마리를 사서 모터보트를 빌려 진양호 제일 가운데에 방생했다. 그 작업을 3개월을 했다. 결과적으로 그 이후에 내가 잉어를 그리게 되고 또 잘됐으니 효험을 본 셈이다. 이런 일들이 쌓이니 잉어가 날 살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다.
-작업실에 잉어 작품 이외에도 인물, 풍경, 정물 등 다양하다.
△인물이고 정물, 풍경 모두 도가 텄다. 그림을 배울 때부터 스승님이 그렇게 가르쳤다. 화가라는 이름을 내려면 뭐든 다 그릴 줄 알아야 한다고. 스케치도 사진을 찍어서 그리는 것은 안되고 직접 그려오라고 했다. 그리다가 생각이 안 나면 가서 그리고 또 가서 그렸다. 그러다 보니 스케치는 도사가 되더라. 뭐든 세밀하게 그려내고 그런 거에 대해서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작업실에 걸려 있는 가로수의 풍경들이 최근에 그린 작품이라고. 예전 작품들처럼 세심한 묘사라기보다 언뜻 흐리고 몽환적이다. 앞으로 그리고 싶은 것들이 있는지.
△옛날부터 무엇을 그리든 세밀하게 그려왔다. 그런데 이제는 정확하게 그대로의 모습을 담는 것이 싫어졌다. 그냥 막 그리고 싶다. 편안하게 허리를 펴고 마음에 있는 걸 쏟아내듯 자연스럽게 그리는 거다. 그래서 요새 그리는 것이 풍경이다. 예전처럼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물감을 칠하기보다는 스케치 없이 붓이 가는 대로, 내 기억에 있는 풍경을 다시 그려내는 일이다.
어태희 기자 ttott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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