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며] 촉석루는 진주시민의 정신적 지주- 강진태(진주본부장)

기사입력 : 2025-01-22 19:01:18

“영남에는 산이며 강이며 누대의 빼어난 경치가 많은데 진주가 그 제일로 이름이 온 나라에 드러남은 촉석루가 있기 때문이다.”

진양군 수곡면 출신의 성환혁이 1960년 촉석루를 중건하며 적은 글 중 일부다.

경남은 조선시대 3대 누각 중 두 곳을 품고 있는데 바로 진주시 촉석루와 밀양시 영남루다. 두 누각 모두 남강과 밀양강의 절벽 위에 자리잡고 수백년간 한반도의 풍경을 지키며 깊은 역사를 간직해왔지만, 문화유산에 대한 지위는 다르다. 영남루는 국가지정문화유산(이하 국보)이지만, 촉석루는 아직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에 그치고 있다. 촉석루가 국보 지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촉석루는 1241년 진주 목사 김지대가 창건한 이후 조선시대와 근현대를 거쳤지만 원형을 유지해 1948년 국보로 지정됐으나 6·25전쟁 때 전소되면서 그 지위를 잃었다. 촉석루는 진주 남강 바위 벼랑 위에 건립돼 주변의 수려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빼어난 입지를 갖춰 전시에는 지휘소, 평시에는 과거 시험장, 연희 장소 등으로 쓰였다.

서쪽으로는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의기사, 동쪽으로는 촉석문과 촉석루 삼문, 북쪽으로는 임진왜란 때 전사한 충혼을 기리기 위한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남쪽으로 내려가면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뛰어들었다는 의암이 있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 등을 겪으면서 온갖 풍상의 중심에 있는 촉석루는 누각 그 자체의 가치도 높지만 진주시민에게는 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사실상 진주 그 자체이며,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 즉 진주정신을 일컫는 상징적 건축물로 국보 이상의 정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촉석루는 소실 이후 1956년 진주고적보존회를 중심으로 중건이 추진돼 1960년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을 갖춘 건물로 복원됐다.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2020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이후 지속적인 국보 승격을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국보 지정에 청신호가 켜졌다는 희소식이 나왔다. 2016년 당시 국가문화유산청이 국보 지정을 부결한 것은 촉석루 복원 과정에서 지형이 평탄화된 점 등 3가지 정도의 원형 훼손이 문제였다. 하지만 지난해 경남연구원 역사문화센터 이재명 연구원이 소실 전인 1937년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가 작성했던 촉석루 실측도면과 1957년 복원시 작성된 도면을 새롭게 발굴하면서 사정은 급격히 변했다. 두 도면을 비교 분석한 결과 동일한 도면으로 확인돼 원형으로 복원된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이 연구원이 발견한 문헌과 사진을 보면 국보 지정 전인 일제강점기에 신작로 개설로 이미 지형이 평탄화돼 복원 당시 지형의 훼손이 없었음이 확인됐다. 이에 따라 관련 전문가들은 새로 밝혀진 사실을 국가유산청에 설명하고, 학술적, 예술적 가치와 승격의 정당성을 공유한다면 국가지정문화유산 지정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진주시도 곧바로 국보 승격 신청에 나서는 등 촉석루 국보 승격을 위한 움직임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촉석루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누각의 건축학적 가치의 측면도 중요하지만, 진주의 상징이며 시민의 정신적 지주라는 사실보다 더하지는 않는다. 34만 진주시민의 간절한 소망인 촉석루 국보 승격을 기원한다.

강진태(진주본부장)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강진태 기자의 다른 기사 검색


  • -----test_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