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파] 헌책방- 주재옥(편집부 차장대우)

기사입력 : 2024-09-24 19:13:42
주재옥 경제부 기자

윤동주는 자선 시집 세 부를 필사해 스승인 이양하, 후배인 정병욱에게 선물하고 한 부는 자신이 가졌다. 학도병으로 징집된 정병욱은 윤동주의 육필 시고를 지켜달라며 자신의 어머니에게 맡겼다. 그의 어머니는 해방이 되고 나서야 명주 보자기를 겹겹이 싸서 간직해뒀던 원고를 꺼냈다. 훗날 윤동주 본인과 이양하가 가지고 있던 건 일실됐고, 정병욱이 지켜낸 것만 살아남았다. 정병욱의 글을 보는 안목과 어머니의 기지가 없었다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안목 있는 주인의 헌책방엔 고유한 질서와 체계가 존재한다. 오장환 시인이 1937년 문 연 ‘남만서방’이 대표적이다. 이곳엔 그가 도쿄에서 수집해온, 서울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서양의 진귀한 시집의 초판과 한정본이 가득찼다. 그는 ‘남만서고’란 출판사를 등록한 뒤 자신의 두 번째 시집 ‘헌사’와 김광균의 첫 시집 ‘와사등’을 출간했다. 공들여 소량 제작한 한정본답게, 책에 대한 그의 집요한 애착이 드러난다.

▼세상에 나오는 책들에 투영된 희망은 ‘팔리는 책’이 되는 것이다. 책들 중 일부는 내재적 가치를 잃고 재생을 위한 종이 뭉치가 되어 고유 형태를 잃어버리는 쓸쓸한 숙명을 감내한다. 선택받지 못한 책들은 정처 없이 떠돌다,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순간 생명력을 얻는다. 책을 펼친다는 것은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내 곁에 붙들어두는 일인 것이다.

▼대다수 헌책방이 알라딘 등의 플랫폼을 활용해 온라인 영업을 병행하면서, 원하는 책을 구하기 위해 발품 팔 일이 없어졌다. 강은교 시인은 시 ‘아벨서점’에서 ‘잘 안 열리는 문을 두 손으로 밀고 들어오면/ 헌 책장을 밟고 선 문턱이 세상의 온갖 무게를 받아안고 낑낑거리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라며 헌것에 깃든 정신을 예찬했다. 책은 빛바래져도 변치 않는 것이 있다. 오래된 것에 애틋함이 묻어나는 이유다.

주재옥(편집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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