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파] 잠- 주재옥 (편집부 차장대우)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잠’엔 악몽을 꾼 후 17일째 불면증에 시달리는 주부가 등장한다. 주인공은 깨어 있는 시간 동안 혼자 술을 마시며 러시아 고전을 읽거나, 밤 드라이브를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그녀는 “잠을 잃으면 존재 기반을 잃게 된다”면서도, 잠들지 않는 순간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시간”이라며 오히려 살아 있음을 느낀다. 불면은 주인공에게 삶을 확장해주는 계기지만, 현실에선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괴로운 문제다.
▼‘잠’은 흑인들의 저항 수단이었다. 흑인 여성 트리샤 허시는 2017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집단 낮잠 체험’을 주도했다. 인종차별이 극심한 미국에서 흑인 여성으로 살아온 허시는 ‘과로 문화’의 원인으로 백인우월주의를 지목했다. 그녀는 “우리 몸은 미국이 가진 최초의 자본이었고, 그로 인해 휴식과 꿈의 공간을 끊임없이 탈취당했다”며 “수면 부족은 인종적, 사회적 정의의 문제”라고 비판했다.
▼심리학자 스탠리 코렌은 저서 ‘잠도둑들’에서 “어둠을 밝혀준 에디슨의 ‘전구’는 잠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잠자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여기는 사회적 통념으로 인해, 의식적으로 수면 욕구를 줄이게 됐다”고 했다. 이를 두고 수면 연구자 월리엄 디멘트는 ‘잠빚’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적정 수면을 채우지 못하면 피로가 빚처럼 쌓인다는 뜻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는 수면 부족을 아예 ‘공중보건 전염병’으로 분류해 경고하고 있다.
▼철학자 볼테르는 ‘신은 근심의 보상으로 인간에게 수면을 줬다’고 말했다. 잠은 생존경쟁에서 유예의 시간을 얻은 인류에게 쉬어 가라고 주는 선물이다. 하퍼 리 소설 ‘앵무새 죽이기’엔 잠의 진리를 일깨워주는 구절이 나온다. ‘아침에는 항상 상황이 나아진다.’ 잔다는 건 내일에 기대어,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일이다.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시간은 오늘도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다.
주재옥 (편집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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