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파] 달리기- 주재옥(편집부 차장대우)

토끼, 개, 양, 사자, 오리가 일제히 달린다. 다섯 동물이 속력을 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르막길에 닿는다. 가파른 경사에 커다란 강이 펼쳐진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선두의 순서가 바뀐다. 비가 내리고, 밤이 찾아와도, 따가운 해가 내리 쬐도 멈추지 않는다. 완주라는 목표를 향해 잠시 쉬어갈 뿐이다. 이하진의 그림책 〈오래달리기〉는 빨리 뛰는 것만이 승자가 아님을 일깨워 준다.
▼달리기는 누가 더 멀리 가는지 겨루는 운동이 아니다. 거리뿐 아니라 어떤 속도로 달릴지를 정하고 나아가는 일이다. 마라톤에선 그 ‘어떤 속도’를 ‘페이스(pace)’라 칭한다. 빠른 페이스로는 긴 거리를 달릴 수 없고, 천천히 뛰면 좀 더 먼 곳까지 갈 수 있다. 거리의 강박을 벗어던지면 속도에 신경 쓰며 달리는 단계에 들어선다. 더 이상 ‘얼마나 멀리’는 중요하지 않다. ‘마이 페이스(my pace)’를 유지하며 결승점에 골인하는 ‘성취감’만이 살아있을 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아침 달린다.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가는 것이 중요하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과거의 자기 자신”이라고 했다. 김연수는 에세이 〈지지 않는다는 말〉에서 “달리기를 하는 이유는 절망과 좌절, 두려움이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달리기는 삶의 틈을 채워나가는 일인 셈이다.
▼나만의 속도를 유지하려 애쓰는 게 달리기 세계만은 아니다. 삶에도 저마다의 페이스가 존재한다. 헤밍웨이는 ‘진정한 고귀함이란 타인보다 뛰어난 것이 아닌,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결과는 종종 과정의 의미를 집어 삼킨다. 이기지 않는 것이 반드시 지는 건 아니다. 느리지만 각자의 속도로 완주하는 것, 삶의 물음표와 마주할 수 있는 힘이다.
주재옥(편집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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