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칼럼]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랴!- 이재달(심산서울병원 부이사장·방송통신위원회 지역방송발전위원)

기사입력 : 2025-02-05 19:33:04

‘ⅹ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이 있다. 자기 잘못이 더 크고, 변변하지 못한 사람이 남의 흉은 잘 본다는 뜻이다. 자기 행동에 대해서는 봄바람처럼 관대하지만, 타인의 잘못에는 가을 서릿발처럼 냉엄하기도 하다. 이러한 풍조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면서 관용과 아량은 사라졌다. 대결과 갈등이 폭발하고, 극단에서 상대방을 바라본다. 그러니 함께 할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일이 그렇다. 불과 얼마 전 자신의 행태를 까마득하게 잊거나, 잊은 체하면서 상대를 힐난한다.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염치 따위는 아예 없다. 염치없는 줄 알면서도 이를 무릅쓰고 하는 모몰염치(冒沒廉恥)고, 파렴치한 행위다.

어디서 이런 무도한 용기가 나오는 것일까?

첫째로 인지 부조화에 기인한 탓이 크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포도’ 얘기다.

포도나무 옆을 지나던 여우가 대롱대롱 달린 포도를 따 먹고 싶어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한 번도 포도를 따지 못하였다. 그냥 단념하기에는 머쓱해서 “저 포도는 분명히 덜 익어서 실 거야”라며 포기한다. 포도 따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기 행동을 포도가 실 것이라는 생각과 일치시켜 포도를 따지 못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인지부조화 이론을 발표한 미국의 심리학자 리언 페스팅거(Leon Festinger)는 우리가 가진 생각이나 신념, 태도가 실제 행동과 일치하지 않으면 심리적 불편을 느끼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생각과 태도를 바꿔 일관성을 회복하려 한다고 한다.

양극단에 있는 우리나라 정치인도 과거 자신이 견지했던 생각을 바꾸어 염치없는 행동을 뻔뻔스럽게 한다. “과거를 묻지 마시오. 바로 이 순간 나를 향한 카메라 플래시만 있으면 그만인걸!” 하는 식이다. 정의와 진실의 화신처럼 목소리를 높이고, 상대를 악마화할수록 팬덤의 환호가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둘째로는 이렇듯 정치인이 목을 빼고 바라보는 팬덤이 문제다. 최초의 정치인 팬덤은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였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선 뒤 노사모 해체를 명령했다. 그런데 직전 대통령 문재인은 ‘문재인 팬덤’을 양념에 비유하며 심각성에 눈감았다. 지지 기반을 의식해 단호하게 선을 긋지 못한 게 화근이 되어 지금의 ‘개딸’ 같은 극단적인 팬덤 현상을 초래한 것이다. 팬덤은 머리보다 가슴으로 반응한다. 팩트보다는 감성으로, 과학보다는 신화로 통한다.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팩트 확인과 과학적 검증은 관심 밖이다. 정치인은 팬덤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사회 갈등을 편취하고 부풀리는 편향성의 동원(mobilization of bias)을 주저하지 않는다.

팬덤은 제이슨 브레넌(Jason Brennan)이 지칭한 세 종류의 민주시민- 이른바 정치에 무관심한 호빗형, 정치의 광적인 팬인 훌리건형, 정치를 과학적으로 여기는 벌컨형- 가운데 훌리건 유형에 해당한다. 훌리건 유형은 강경하며 나름 확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편향된 방식으로 정치 정보를 소비한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는 정보를 찾고, 자신의 의견과 모순되거나 확증해 주지 않는 증거는 무시하고 거부한다.

극과 극으로 갈라져 내전 상태를 방불케 하는 한국 정치판은 훌리건 양성 학원이 되다시피 됐고, 훌리건은 정치판을 ‘아사리판’으로 만들었다. 난투극과 거친 말싸움이 난무하는 것은 이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 이 책임에서 비켜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감히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하루하루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추며 옷깃을 여미어야 할 따름이다.

이재달(심산서울병원 부이사장·방송통신위원회 지역방송발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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