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칼럼] 미나리의 쓴맛- 신용욱(경상국립대 6차산업학과 주임교수)

아직 춥지만 입춘이 지나면서 해가 길어진 것을 체감한다. ‘추울 때는 무김치, 봄에는 미나리 김치’라는 말처럼 입춘이 지나면 세배를 핑계로 입맛을 살리려 처갓집에 간다는 의미로 ‘처갓집 세배는 미나리강회를 먹을 때 간다’는 속담이 있다.
미나리 하면 생각나는 영화 ‘미나리’는 1980년대 한국인 미국 이민자 가족의 이주와 정착 과정을 재현한 영화로 실제로 감독의 할머니가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가 미국 현지에서 잘 자라는 모습에 인상이 남아 영화제목이 되었으며 미나리의 질긴 생명력과 적응력이 가족과 닮았다고 했다. 전통적으로 미나리의 속성 3가지를 보고 3가지의 덕을 배운다는 근채삼덕(芹菜三德)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미나리로부터 진흙 속에서도 자라는 포용력, 음지에서 자라는 의지, 마지막으로 가뭄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생명력을 배우자는 이야기다. 타 문화에 대한 포용력과 강인한 의지는 연결되어 미주 한인들의 강인한 정착력과 연결되는 것 같다. 미나리의 강인한 생명력은 우리 문화에서 장수를 상징하는 상징성으로 투영되어 돌상에 올려지기도 했다.
변변치 않은 미나리이지만 임금에게 정성을 다해 바쳤다는 <여씨춘추(呂氏春秋)>의 고사에서 유래된 헌근(獻芹)이라는 말은 편지글에서 남에게 선물을 보낼 때 겸칭으로 정성된 마음을 나타낼 때 쓴다. 고기나 지단을 미나리로 돌돌 말아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미나리강회가 궁중요리에도 포함될 정도로 미나리는 서민적인 식재료이지만 왕실이 찾는 품격을 가진다.
숙종조 인현왕후의 폐위를 두고 서인 세력이 서울에 퍼트린 노래에도 미나리가 나온다. “미나리(인현왕후)는 사철이요, 장다리(장희빈)는 한철이라”.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 언어적 유사성으로 ‘착한 조강지처를 내쫓은 못된 첩실을 응징하자’라는 의미이지만 현재까지 노동요로 구전되는 ‘미나리요’에서 미나리는 변함없이 선하고 푸르름을 나타내고 있다.
미나리는 흔한 채소이지만 고기와 잘 어울린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의 요리책 〈정조지(鼎俎志)〉에도 나오고 ‘흑백요리사’에도 나온 ‘미나리 전립투’라는 음식은 조선시대 병졸의 투구를 본뜬 구이와 전골을 위한 무쇠로 된 그릇인 전립투에 챙 부위에는 고기를 굽고, 고기의 양념과 육즙이 모자 안으로 흘러 육수와 함께 끓으면 버섯과 채소를 넣어 전골로 먹던 방식인데 ‘흥부전’에 흥부의 자식 중 한 명이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는 장면에서 에고, 어머니, 우리 벙거짓골(전립투) 먹었으면…”이라는 대목이 나올 정도로 선망의 대상인 고기와 잘 어울린다. 굳이 흥부전 이야기를 안 해도 삼겹살 구이에 미나리가 잘 어울리는 것만 봐도 쉽게 이해가 된다.
서민적이지만 궁궐에서도 먹었고 채소이지만 느끼한 고기와 잘 어울리는 균형감을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미나리의 쓴맛 성분 때문이다. 이 성분들은 콜레스테롤 배출로 고기를 먹어도 부담스럽지 않게 하는 것도 있지만 쓴맛이 음식에서 극적으로 국면을 전환시켜 입맛을 돋우고 음식을 고급스럽게 한다. 이러한 쓴맛은 음식 맛에 전면에 나서지 않지만 균형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쓴맛은 두려움을 느끼는 맛이다. 쓴맛은 대개 불행을 의미한다. 쓴맛만 나면 그저 괴로울 뿐이지만, 어떤 음식에 쓴맛을 조금만 첨가하면 맛이 좋아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쓴맛을 넣으면 음식의 맛에 깊이가 더해지고 우리 뇌는 적당한 쓴맛을 구수함으로 인식한다. 쓴맛 나는 음식을 먹으면 다양한 맛 정보가 뇌를 자극하여 맛의 깊이를 느낀다. 와인, 가양주, 커피와 초콜릿의 개성을 나타내는 요인이 결국 쓴맛에 있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아직은 겨울이라 춥고 빨리 봄날이 와서 꽃길을 걷고 싶지만 인생에서 적당량의 쓴맛이 인생의 깊이를 더해주고 개성을 쌓아가는 것이라고 미나리가 전해주는 교훈이 추위를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
신용욱(경상국립대 6차산업학과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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